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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범종소리/김선태

에세이향기 2023. 5. 8. 03:43

저녁 범종소리

 

김선태

 

 

 

울리다, 적시다, 덮어주다, 쓰다듬다, 재우다 같은 동사를 앞세우며 간다

 

낮다, 길다, 무겁다, 둥글다, 느리다, 너그럽다 같은 형용사들이 뒤따라간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소용돌이치는 명사들도 모조리 끌어안고 간다

 

지이잉~징 징하게는 곡조를 뽑다가 터어엉~텅 속을 비우며 운다

 

저 소리 속에는

 

묵묵히 쟁기를 끄는 소가 있고, 못난 자식의 가슴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있고,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우는 강물이 있고, 온갖 번뇌를 잠재우는 고요의 이부자리가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껴안는 넉넉한 품이 있다

 

오늘도 만물의 귀소를 알리며

고단한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 하나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저녁 들판을 기어간다

 

(김선태 시집, <그늘의 깊이>, 문학동네, 2014)

 

 

[감상]

최하림 시인은 산사의 범종소리 같은 시를 쓰시겠다고 선언했지요. 산사의 범종소리는 산위에서 지극히 낮은 소리로 울려서 산 아랫마을로 내려옵니다. 조용조용히 내려오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원만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가라앉게 해줍니다.

 

범종소리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동사들이 있습니다. “울리다, 적시다, 덮어주다, 쓰다듬다, 재우다” 등입니다. 범종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형용사들이 있습니다. “낮다, 길다, 무겁다, 둥글다, 느리다, 너그럽다” 등입니다. 범종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명사들도 있습니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 등입니다. 범종소리 속에서 그 수많은 동사와 형용사와 명사들을 구별해보십시오. 범종소리가 한결 다르게 들리실 것입니다.

 

범종소리의 곡조 속에는 진하다 못해 징한 흐느낌이 있고, 텅텅 빈 허공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묵묵히 쟁기를 끄는 소가 있고, 못난 자식의 가슴을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있고,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우는 강물이 있고, 온갖 번뇌를 잠재우는 고요의 이부자리가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껴안는 넉넉한 품이” 있습니다. 범종소리는 인간의 아름답고 슬프고 고달픈 삶을 모두 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최하림 시인이 산사의 범종소리 같은 시를 쓰시겠다 하셨겠지요.

 

저도 산사의 범종소리 같은 글을 써보려 합니다. 범종소리가 못 되거든 목탁소리로라도 들어주십시오. 목탁소리도 못 되거든 풍경소리로라도 들어주십시오. 풍경소리도 못 되거든 풀벌레 소리로라도 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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