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연어의 나이테 / 복효근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 넣은 굴렁쇠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치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좋은 시 2023.10.14

계단 외 9편 / 박일만

계단 외 9편 / 박일만 이 발밑에 단단한 짐승은 무엇인가 꼿꼿한 등뼈를 자랑하며 앞발을 치켜들고 부동자세의 근본을 마스터한 짐승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출세에 오르고 누군가는 이곳을 거쳐 퇴장도 했을 땅속에 아랫도리 깊이 박고 포효하는 짐승 수많은 발들이 육중하게 오가도 끄떡 않는 선천성, 힘과 근육이 적나라한 태생이다 난간을 레일삼아 층층이 달려가는 고속열차다 시간도 여기서는 힘을 보태며 생의 속도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멈춤을 모르는, 질주에 익숙한 근성 한때 나에게도 저런 유전자가 있었던가 이곳에 기대어 상승의 욕망을 키운 적 있었던가 등뼈를 타고 오르내리는 식솔들의 눈총을 맞으며 숨차게 페달을 밟기도 했겠지 건물 한 곳을 덥석 물고 출세를 향해 돌진하는 짐승 어설픈 처세에나 골몰하며 살아 온 나,..

좋은 시 2023.09.26

청보리밭 외 2편/사윤수

청보리밭 외 2편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짖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내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초록 비단 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바람..

좋은 시 2023.09.24

살구/이은규

살구 이은규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은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이제 한 사람은 없고 긴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한 사람만 남았다 살구나무는 잘 있지요 안 들리는 안부는 의문문과 평서문 사이에 있고 살구꽃말은 수줍은 또는 의혹 (하략) ―이은규(1978∼) 낮 기온이 높아지고 해가 뜨겁다. 우리에게는 그늘이 필요하다. 삶의 난도는 높고 성실해도 쉽지 않다. 내내 달려온 다리와 마음에도 그늘이 필요하다. 기도, 명상, 휴식, 여행. 뭐가 되어도 좋다...

좋은 시 2023.09.23

방어(魴魚)/사윤수

방어(魴魚) 사윤수 머리에 뼈만 달린 주검이다 피 한 방울 흘린 자국 없이 살점은 이미 한 점 한 점 잘 도려내졌으니 자신의 죽음을 방어하지 못한 방어, 형식은 죽었으나 내용은 죽지 않았다는 듯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끔 입을 뻐끔거린다 밀물로 밀려왔다가 썰물로 쓸려가는 쇠잔한 숨 입 속의 어둠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기억은 주검 안에 아직 살아서 모슬포 푸른 바다를 건너는가 저 살점들을 다시 뼈에 봉합하면 방어는 살아서 수평선 끝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죽은 줄도 모르고 너는 또 파르르르 지느러미를 떤다 물고기 한 마리만 떠나도 바다는 허전한 법, 파도치는 무채와 오색 데커레이션 위에 가지런히 누운 방어회 한 틀 꽃상여 같다 곡두는 없으나 먹기조차 아까운 순교다

좋은 시 2023.09.23

저녁이 머물다/박성현

저녁이 머물다 박성현 ​ ​ 바람이 불었네 미세먼지가 씻겨 간 오후 외투에 툭, 떨어진 햇살 한줌 물컹했네 잠시 병(病)을 내려놓고 걸어 다녔네 시청과 시립미술관이 까닭 없이 멀었네 정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해 기우는 서촌에서 부스럼 같은 구름을 보았네 물고기는 허공이 집이라 바닥이 닿지 않는데 나는 바닥 말고는 기댈 곳 없었네 가파르게 바람이 불어왔네 내 몸으로 기우는 저녁이 쓸쓸했네 쓸쓸해서 오래 머물렀네

좋은 시 2023.09.23

빈집 속의 빈집/ 김신용

빈집 속의 빈집/ 김신용 땅끝을 지나,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땅끝에 매달려 저기, 수척한 바다처럼 누워있는 사람, 그 바다에 나는 얼마나 많은 섬들을 띄워놓았던가 말의 섬들, 햇살 속에 온갖 어족의 비늘로도 반짝이던 그 다도해, 그러나 그 섬들은 이제 마당가에 뒹구는 빈 장독들처럼 불룩해진 배로 상상임신의 헛구역질만 하고 있음을 보네, 말의 뼈를 뽑아 삭아버린 서까래 하나 얹지 못한 덜컹이는 바람벽의 못 하나 되지 못한 빗방울 스미는 저 녹슨 함석지붕 하나 떠받치지 못한 말의 무수한 발자국만 남긴 몸, 이제 이 땅의 끝까지 지나왔지만 저기, 赤湖에 잠겨 잡풀 우거진 빈집으로 누워있는 사람, 그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좋은 시 2023.09.18

명태/ 우남정

명태/ 우남정 불길을 줄이며 생각해 본다 온 힘을 다하여 끓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들은 어떻게 대관령 덕장까지 흘러왔을까 휑한 옆구리를 여밀 틈도 없이 명태는 흰 눈을 뒤집어쓰고 얼었다 녹았다 녹았다 얼었다 샛바람에 속없이 말라갔을까 뻣뻣해진 몸 흠씬 두들겨 맞으며 거죽 벗겨진 살집 으스러지며 참기름에 달달 볶이며 우러나고 또 우러나야 할까 육수가 유리 뚜껑을 치받고 뚝뚝 떨어질 때까지 시원한 것과 뜨거운 것이 분간이 안 갈 때까지 끓고 또 끓어야 할까 뼛속까지 들락거리며 울고 있는 기포들처럼 자작자작 잦아들며 뭉그러져야 할까 헛헛한 속 다독이는 뜨끈한 국 한 사발의 힘이여 북엇국을 끓이다 돌아다본다 유유히 헤엄쳐 회향하는 명태 한 마리 - 언젠가 한번 스토리에 썼던 말이 생각난다. 찌개를 끓이며... ..

좋은 시 2023.09.15

먹갈치 / 조수일

먹갈치 / 조수일 야행성이었다 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 대낮엔 모래 틈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 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 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 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붙었다 어둠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 북항의 밤은 늘 멀리서 찬란하였다 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 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 자신의 바다에서 단 한번도 刀漁가 되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 갈라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 마지막 실존이었던 銀粉마저 다 털려 유영의 꿈을 접었던 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게워내느라 갑판 위가 흥건했다 짠물을 다 마시고도 채우지 못한 허기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좇는 허영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깊이를 가늠..

좋은 시 2023.09.12

목공소에서/마경덕

목공소에서 / 마경덕 희고 매끄러운 널빤지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나무는 제 몸에 지도를 그려 넣고 손도장을 꾹꾹 찍어 두었다. 어떤 다짐을 속 깊이 새겨 넣은 것일까. 겹겹이 쟁여둔 지도에 옹이가 박혔다. 생전의 꿈을 탁본 해둔 나무, 빛을 향해 달려간 뿌리의 마음이 물처럼 흐른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는 목공. 완강한 톱날에 잘려지는 등고선. 피에 젖은 지도 한 장 대팻날에 돌돌 말려 나온다. 죽은 나무의 몸이 향기롭다. 날아라 풍선 / 마경덕 끈을 놓치면 푸드득 깃을 치며 날아간다 배봉초등학교 운동회, 현수막이 걸린 교문 앞에서 깡마른 노인이 헬륨가스를 넣고 있다. 날개 접힌 납작한 풍선들. 들썩들썩, 순식간에 자루만큼 부풀어오른다. 둥근 자루에 새의 영혼이 들어간다. 노인이 풍선 주둥이를..

좋은 시 2023.09.09

태양초/김동임

태양초 김동임 시인 물고추를 한소쿠리 따와 멍석에 넌다 맵고 아린 햇살을 안으로 안으로 굴린다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아홉번을 굴리고 드디어 단아하다 한데 외형은 멀쩡해도 벌레에 상처를 입고 맥 못 추는 녀석이 많다 작심하고 덤비는데 힘을 사용했나 보다 장군만한 체구가 터득한 미는법, 굴리는 법을 익히지 못했나 보다 어쩌랴, 그래도 나는 버릴 수가 없어 속을 훑어 다시 넌다

좋은 시 2023.09.08

두부에 대하여/이재무

두부에 대하여 ​ 두부가 둥그런 원이 아니고 각이 진 네모인 까닭은 네모가 아니라면 형태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 저 흔한 네모들은 물러 터진 속성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언제든 흐물흐물 무너질 수 있는 네모 너무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네모 가까스로 네모를 유지한 채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네모 제가 본래 단단하고 둥근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네모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은 네모 지가 진짜 네모인 줄 아는 네모 언제든 처참하게 으깨어질 수 있는 네모 둘러보면 그런 두부 같은 네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 ​ ​ 다시 두부에 대하여 ​ 형기 마친 죄수가 감옥 나설 때 왜 두부를 먹이는지 알겠다. 두부는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부는 저항을 모른다. 저를 베고 찌르는 칼, 연한 살로 감싸는 두부는..

좋은 시 2023.09.08

첫날/권희돈

첫날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 부디 지난 날의 회한에 물들지 마오 추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눈꽃 결코 잡히지 않는, 내일을 근심치 마오 희망은 숨어 있는 것 다가서면 멀어지는 신기루 추억은 깃털에 묻고 희망은 별빛에 묻고 밤 새워 한뎃잠을 자고 나온 아침까치처럼 겁도 없이 인간에 내려앉는 저 황홀한 가벼움을 오늘도 반가로이 맞이하시라 오오, 오늘은 그대 남은 날들의 첫날 휴지 더럽다고 함부로 버리지 마라 더러움의 그 근원을 생각하라 안으로 들어가던 모든 순수가 더러움으로 나오는 까닭은 헤아려라 더럽다고 함부로 짓밟지 마라 너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라 눈물 한 방울 나누어 준 적이 있느냐 피 한 방울 나누어 준 적이 있느냐 보아라, 하늘에 뜻을 세운 저 순백의 침묵을 탐욕에 물들지 아니하고 유..

좋은 시 2023.09.07

모과의 건축학/홍계숙

모과의 건축학 홍계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 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 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좋은 시 2023.09.07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경윤 - 김남주시인 생가에서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날이면 뜨거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봉학리 남주형 집에 간다 덕종이형은 또 어느 집회에 갔는지 빈집처럼 고적한 마당귀 장독대에 쑥부쟁이만 우북하다 그늘 깊은 뒤란에는 살아생전 시인의 죽창이 되고 서슬 푸른 칼날이 되었던 청대나무와 조선솔이 여즉도 푸른 날을 세우고 있다 한때 군불을 지피며 하이네와 네루다를 읽었다던 그러나 지금은 곰팡내 나는 행랑채 빈방에서 늙은 농부의 축 처진 뱃가죽처럼 너덜거리는 흙벽을 마주하고 앉아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에 꽂히는*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노래를 홀로 불러본다 어두운 골방에서 제 핏줄 같은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혼신의 노래를 부르던 순결한 그 사내들은 다 어..

좋은 시 2023.09.06

불의 경전을 읽다/김경윤

불의 경전을 읽다 김경윤 ​ ​ 누가 한사코 이 먼 이국까지 와서 내 슬픔의 창을 두드리는가 나는 단지 별을 찾아왔을 뿐인데 낭만을 선사한다는 몽골의 별빛 때문에 누추한 게르의 밤을 허락했는데 밤이 깊을수록 바람의 신이 데려간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영하 40도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에서는 바람의 악사들이 켜는 모린호르의 노래 게르의 천창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 눈물이 되어 불꽃을 적신다 난로의 연통에 불꽃만 날고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불꽃이 날리는 것은 난로에 장작이 없다는 것 게르에서 겨울밤을 보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지 마음에 불꽃이 없으면 언어는 단지 연기 같은 것 따뜻한 불을 지필 장작 같은 말 한마디 그리운 밤 바람의 신을 추종하는 연기가 허공에 새긴 만자卍字들 밤새 마음에 새기며 타닥타닥 장..

좋은 시 2023.09.06

서울로 가는 전봉준/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좋은 시 2023.09.03

유안진 . 안동(安東)

유안진 . 안동(安東) 어제의 햇빛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를 앞서던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댓 귀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좋은 시 2023.08.19

울고 싶은 마음/박소란

울고 싶은 마음 박소란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하략) ―박소란(1981∼ ) 그 사람 왜 좋아하냐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은 데에는 이유가 없다. 어느 순간 ‘아!’ 하고 좋아지는 거다. 박소란 시인의 작품은 그렇게 좋아지는 시다. 잔잔하게 다가와 오래 수런거리는 시. 첫 시집 제목처럼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 이런 시를 좋아하신다면 박소란 시인이 정답이다. 나도 언제 새 시집이 나오나 서점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특히나 그의 시는 힘들..

좋은 시 2023.08.19

김륭 시

김륭 시 심야深夜 /김륭 달 없이 오는 밤의 젖꼭지를 꺼내던 시골집 앵두나무는 얼마나 발을 헛디뎠을까 동구 밖에 주저앉은 바람을 불러다 눈두덩 꿰매던 어머니 먹감나무 위에 걸어둔 까마귀 얼굴로 밥상 뒤집어 하늘에 시비할 궁리가 남았는지 출몰이 잦아진 거미들이 옭아맨 눈물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맡이 어금니처럼 평평해지는 시간, 다세대주택 옥상에 널어둔 사각팬티가 안정을 찾아가듯 늙어간다는 게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죄스러워지거나 말거나 구불구불 길을 나서는 화사花蛇의 시간 한 여자의 지아비로 살기엔 너무 늦어버린 몸의 가장 가파른 곳에 도사리고 앉아 밥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지 꽃과 살을 섞고 싶을 때가 있지 가뭄 든 논둑의 뱀딸기처럼 등 돌려 우는 딸에게 새끼손가락을 걸 듯 사는 게 고마워지거나 말거나 ..

좋은 시 2023.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