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허공한줌/나희덕

허공한줌/나희덕 ​ 이런 얘기를 들었어. ​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어. ​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

좋은 시 2024.02.04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통화 / 김경미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좋은 시 2024.01.28

의자왕 / 신미균

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

좋은 시 2024.01.28

不惑의 구두 / 하재청

不惑의 구두 /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가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

좋은 시 2024.01.28

가족사진 -고경숙

가족사진 -고경숙 기와집 마당에 일가가 서 있다 집 안에 유일하게 있는 입식의자 두 개도 나왔다 자리 잡고 앉은 일대 조부 무릎에 기대고 뻗정다리로 서 있는 삼대 손자들 몸을 뒤틀고 있다 싫다는 객식구 김 씨와 박 씨까지 불려 나와 어색하게 뒷줄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이대 가장에게 초점을 맞추다 멈칫, 양복 윗도리 옆에 부엌에서 일하다 뛰어나온 앞치마 혼자 대열 밖으로 도드라져 사진사는 무안하지 않게 다들 옷매무새 한번씩들 정리해달라고, 모인 사람들 옷마다 단추란 단추는 다 채워지고 포마드로 쓸어올린 머리칼 한 올 허투루 날리지 않는다 앞치마 여자는 젖은 손으로 머리칼만 귀 뒤로 넘긴다 이제 모두 정면을 응시한다 오래된 기와지붕도 그 너머 대밭도 그 위를 지나던 구름도 구석에 받쳐놓은 낡은 자전거도 햇..

좋은 시 2024.01.28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좋은 시 2024.01.24

보리 굴비 / 박찬희

보리 굴비 / 박찬희 깊은 곳, 동안거에 들 날이 가까워지면 옆구리가 가려웠다 수년을 가로거침 없던 길 없는 길이 아른거리기만 하고 바싹 말라버린 감정이 압착된 채 눌어붙어 겉보리 색깔이다 ​ 꼬아 내린 새끼줄이 미명을 건져 올리는 때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억, 잊은 물질의 기법을 유추해 켜켜이 돋워 꿰면 아가미에서 배어 나오는 소금기 바람이 낙관을 찍고 갈 때마다 입술이 들썩거리고 항아리 깊은 속에서 오장육부를 비워내면 아가미를 통해 내통하는 바다와 육지 ​ 숨이 찬 시절이 건조되는 동안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흘러 빠져나가는 너울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음께를 바람이 변주하면 뭉툭하던 허리를 조여 맨 상처가 껍데기에서 바삭거린다 ​ 잠이 깰 때 아무 느낌이 없게 될지도 모르는 귓속말을 차곡차곡 채우면 봄..

좋은 시 2024.01.24

삶의 본때/황동규

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좋은 시 2024.01.23

장작을 패며/오세영

장작을 패며 오세영 ​ 장작은 나무가 아니다. 잘리고 토막 나서 헛간에 내동댕이친 화목(火木), 영혼이 금간 불목하니. 한 때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워 올린 잎새들로 길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만, 탐스런 과육(果肉)으로 지나던 길손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도 했다만 잘려 뽀개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분노를 되새기며 미구에 닥칠 그 인내의 한계점에 서면 내 무엇이 무서우랴. 확 불 지르리라. 존재의 빈터에 버려져 처절히 복수를 노리는 저 차가운 이성, 잘린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금간 것들은 이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좋은 시 2024.01.19

최문자 시 모음

최문자 시 모음 31편 ​ 《1》 ​ 고백 ​ 최문자 ​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 ☆★☆★☆★☆★☆★☆★☆★☆★☆★☆★☆★☆★ 《2》 ​ 거짓말을 지나며 ​ 최문자 ​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

좋은 시 2024.01.17

문성해 시 모음

문성해 시 모음 20편 ​ 《1》 ​ 검색 공화국 ​ 문성해 ​ 도서실 컴퓨터실에 붙박이로 앉은 사람들 젊어서 천천히 찌그러지고 있는 사람이나 늙어 한꺼번에 찌그러진 사람이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지독한 모니터와의 사랑이다 제가 궁금하면 검색해 보세요 그 남자는 여유 있게 말했다 나는 쿠키를 오븐 없이 굽는 방법을 검색하며 쿠키도 프라이팬에 구울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실이 떠나가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모두들 천기를 누설 받는 결연한 표정들이기에 관두기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게 하는 법과 물속에서 물고기랑 오래 대화하는 법을 내리 검색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훔쳐본 옆 사람의 모니터에서 깨알 같은 ..

좋은 시 2024.01.17

이재무 시 모음

공중전화 ​ 이재무 ​ 아날로그의 고집이여, 자랑으로 붐비던 날들 아득한 전설이 되었구나 한창때 너는 잘나가는 몸으로 식욕 또한 왕성해서 뜨겁고 짜고 맵고 싱겁고 차가운 수천, 수많은 사연 다 삼키고도 뜨거웠지만 늙은 창부가 된 오늘 식어버린, 허기진 몸으로 누군가 인색하게 떨군 은화 몇 닢의 동냥 허겁지겁 삼키는구나 시대의 모든보이 시민의 교양이었지만 뒤처진 애물단지가 되어 생의 수건만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생각하면 창부 아닌 삶 어디 흔하랴 줄고 새는 영혼 부풀려 팔고 돌아오는 길 뚜쟁이처럼 서서 호객하는 너를 보는 일 편치 않다 너는 필요보다 크고 무겁고 느리다 네 고집은 불편하다 후불을 모르는 시대의 지지진아 그나마 식은 몸일망정 찾아와 주린 정 채우고 가는 무일푼 고객마저 외면하는 날 올 것인가 ..

좋은 시 2024.01.16

스며든다는 것 / 안도현

스며든다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좋은 시 2024.01.16

정끝별 시

..한 걸음 더.. ​ 낙타를 무릎 끓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 사람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일 ​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 ​ ​ ..세상의 등뼈..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께를 대주고 ​ 대준다는 것..

좋은 시 2024.01.15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좋은 시 2024.01.15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

좋은 시 2024.01.15

풍장/황동규

풍장/황동규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좋은 시 2024.01.13

종이의 나라/김영아

종이의 나라 김양아 등 굽은 새벽이 낡은 손수레에 쌓아올린 묵직한 산을 끌고 간다 어느날 악몽을 꾼 나무들이 두꺼운 종이상자로 변신해 차곡차곡 포개진다 소비를 즐기는 도시는 끊임없이 포장을 벗겨낸다 택배는 쌓이고 박스의 접힌 각이 풀리고 모서리가 무너진다 바깥으로 밀려나 독거노인과 한 묶음이 된다 종이의 나라 그들만의 거래처는 치열하게 움켜쥔 밥줄이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내주지도 않는다는 게 그들 사이의 불문율, 땀 한 되에 60원을 쳐준다는 종이박스는 앞 다투어 수거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로 고단한 노구를 밀어내는 도시 시장골목과 상가를 돌아온 새벽이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저 아찔함, 다급한 클랙슨이 바퀴를 밀어붙인다 발품을 팔아 엮은 오늘의 노동이 기우뚱거린다 질경이의 꿈 임경묵..

좋은 시 2024.01.12

도시가 키운 섬/최삼용

도시가 키운 섬 ―감천마을 최삼용 비탈길 뒤뚱이며 기어 오른 마을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한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 비켜가기 위해 잠시 된숨 놓아도 되는 그래서 노곤이 땟물처럼 쩔어진 골목은 이웃집 형광등 불빛까지 남루가 고인 저녁을 달랜다 액땜인 양 보낸 하루로 얻어진 고단을 눕이려 정처에 들면 허기를 부은 양은냄비의 끓는 물속에서 울혈 닮은 라면 스프 물 붉게 우러나고 몸집 부푼 면발 따라 가난의 죄까지 부풀린다 하느님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서 살기에 믿음 약해도 하느님을 빨리 만날 것 같은 도시가 키운 섬 거기에 가난과 실패를 혹은 죄 없는 꿈을 혀끝에 단 채 휘황한 도심 발치에 두고 가난을 품앗이한 우리가 산다 ―시집『그날 만난 봄 바다』(그루, 2022) 홀로 산행을 하며 삼각산..

좋은 시 2024.01.11

​​만년필 / 송찬호

​ ​ 만년필 / 송찬호 ​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

좋은 시 2024.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