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물 묵어라 - 전동균​

​ ​ 물 묵어라 - 전동균 ​ ​ ​ ​ 밤새 앓으며 잠을 못 잔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는다 삶은 고구마와 바나나를 아내는 지금 제 속의 여자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입술은 갈라지고 얼굴은 퉁퉁 붓고 갑자기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 그래도 당신에겐 첫사랑과 어머니가 함께 있어! 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색도 않는다 (…) 물 묵어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물 잔을 건넬 뿐 ​ ​ ​ 갱년기 증세를 견디느라 잠 못 잔 사람은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침 밥상은 약식이다. 아내를 사막으로 쫓겨난 하마 같다고 안타까워할 뿐 남편은 표 내어 위로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하지만 고구마는 목이 멘다. '물 묵어라'는 무뚝뚝한 한 마디에 숱한 감정이 배어 있다. 첫사랑이었던 남편도 말을 안 할 뿐 사실은, 정글로 쫓겨난..

좋은 시 2024.03.01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 ​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 ​ ​ ​ ​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

좋은 시 2024.03.01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 ​ ​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어 기대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울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 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좋은 시 2024.03.01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 ​ ​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이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좋은 시 2024.03.01

비의 문양 - 윤의섭

비의 문양 - 윤의섭 ​ ​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른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른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

좋은 시 2024.03.01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 ​ 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ㅡ 붙잡으려는ㅡ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자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ㅡ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ㅡ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 물줄기 지나간다 ​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 아ㅡ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 ​ ​ ​ ​ 계간 『서정시학』 2011년 여름호 발표

좋은 시 2024.03.01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튀어 오르다 - 조옥엽 ​ ​ 박새 떼 날아오르는 탱자나무 사이사이로 올라오는 양지 꽃잎 숨소리 엎질러진 샛길 따라가다 보면 ​ 하눌타리 서너 줄기 무너져가는 돌담 양어깨로 들어 올리다 지쳐 쓰러진 담장에 억지 걸음을 내디딘 양철판과 헌 문짝들, 함박눈 뒤집어쓴 대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오두막을 감싸고 있다 자신을 품어 줄 땅을 향해 경배하고 있는 지붕과 기둥과 마루와 방문과 주인 노파, 시간은 집과 주인의 마음을 한 물결로 흐르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쪼아댔을까 눈매도 앞태도 뒤태도 옆태도 모두 닮았다 ​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린 샤쓰 하나, 오래된 바램처럼 나부끼고 봄볕에 몸을 맡긴 고양이 한 마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염불하듯 두 발 앞으로 모은다 살구 꽃잎들이 우르르 떼지어 몰려다..

좋은 시 2024.03.01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ㅡ 못골 19 ​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 ​ ​ ​ ​..

좋은 시 2024.03.01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 이문재 ​ ​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있다 눈부시다. 소금 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 ​ ​ ​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중에서 ​ ​ ​ ​ ​ 어른들은 왜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어린 시절,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답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어쩌면 간단합..

좋은 시 2024.03.01

접는다는 것/권상진

접는다는 것 ​ 권상진 ​ ​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좋은 시 2024.02.28

먼지는 힘이 세다 외

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

좋은 시 2024.02.27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백마을에 동백꽃이 피면 - 김희숙 동죽조개 맛이 깊어지면, 서쪽 바닷가 동백마을에 가리라. 마을 앞 고두섬 주변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갯벌에 숨구멍이 보이고 그곳을 호미로 깊숙이 파내 보리다. 부지런히 뻘 속을 뒤지면 봄볕 품은 동죽이 물총을 쏘아대며 손에 잡힐 것이다. 혹여 귀한 백합조개라도 찾는다면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소리쳐보리라. 심봤다! 걸어가도 좋으리라. 느직한 걸음걸이에 맞춰가는 길이니 지나치는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넣기에 좋으리라. 드문드문 다니는 군내버스 시간과 바다의 물때가 다른 날에는 천천히 걸어서 동백마을로 들어가리라. 배낭에 기다란 물장화는 개켜 챙기고 김 올린 모시송편을 찬합에 넣고 보온병에 팔팔 끓인 커피물을 내려 등에 짊어져야지. 자동차 길은 산허리를 휘돌아가니 가로지..

좋은 시 2024.02.20

들 / 민혜

들 / 민혜 빈들에 서면 왠지 안도의 숨이 나온다. 추수 끝난 벌판엔 아직 분망했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새봄이 오기까지 들은 긴 휴식에 들어간다. 나는 때로 늦가을의 빈들을 찾아 그 텅 빈 휴지기를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허허롭고 황량하기까지 한 들녘을 향해 한 자락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을 때면 알 수 없는 안식의 숨이 가슴 저 밑으로부터 새어 나오곤 했다. 들은 길게 누워 모처럼의 한유를 누리는 것 같았다. 자식들을 품은 어미인 양 들은 언제나 숙명의 언저리를 뜨지 못했다. 그 자리를 지켜가며 숱한 새끼들을 키워내고 살찌워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보내곤 했다. 재주는 곰이 부렸으나 주머니는 왕서방이 챙기는 것처럼 들은 늘 모든 걸 내어주고 빈 가슴으로 황혼을 맞는다. 곁을 스쳐가는 냇물이..

좋은 시 2024.02.20

삼우 무렵 - 김사인

삼우 무렵 - 김사인 ​ ​ 서리태 한두홉을 냄비에 볶습니다. 서리태를 볶아 와 팔순의 아버지와 작은아들 나와 손녀아이가 둘러앉아 콩을 먹습니다. 어머니는 가시고 장맛비가 오는데 갓 올린 봉분 안부를 아무도 묻지 않고 오독오독 콩을 깨뭅니다. 콩그릇 곁으로 삼대가 둘러앉아 찧고 까부르는 테레비, 테레비만 멀거니 건너다봅니다. ​ ​ ​ ​ * 삼우제(三虞祭): 장사 마친 뒤 세 번째 날의 제사. ​ ​ ​ 하필 장맛비 오는 철이었나. 어머니 봉분은 무사한가, 아무도 묻지 않고 볶은 콩이나 깨문다. 낼 모레가 어머니 첫 기일(忌日)인데, 책 쓴다고 산골짜기에 박혀 있으니 내 처지도 딱하다. 남루하기가 굴 파고 들어앉은 들짐승 꼬락서니나 다름없다. 팔순 아버지와 딸이 있다면 서리태 한두 홉 볶아 오독오독 깨..

좋은 시 2024.02.18

누룽지/정경해

누룽지/정경해 삶이 누룽지 같을 때가 있다 이제 막다른 길이라며 솥을 껴안고 바짝 눌러 붙어 떼를 쓰는 누룽지 같은 으르고 달래고 속을 박박 긁어 봐도 제 말이 옳다 우기는 홧김에 푸념 가득 물 한 바가지 확 끼얹으면 눈물 퉁퉁 반성하며 마음 풀고 일어서는 때로는 모진 삶이 미워 등짝 한번 갈기고 싶지만 돌이켜 보면 구수한 날이 더 많았던 게 삶이다

좋은 시 2024.02.18

가을날 - 김사인

가을날 - 김사인 ​ ​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 ​ ​ ​ ​ 이 시에 무슨 말을 더 얹겠는가. 다만 오늘 하루는 잠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자. 손을 내밀고 손가락들을 부벼 보자.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러나 이미 내 손을 서운하게도 감싸고 있는 차갑고 까끌까끌한 다 늦은 가을볕, 그 서늘하고 서늘해서 허전하고 허전해서 한가한 빛살들을 가슴 한편에다 가만히 대 보자. 텅 빈 마루 끝에 혼자 앉아 저 멀리 단풍도 저물어 온통 비어만 가..

좋은 시 2024.02.17

팔짱을 끼다/정상미

팔짱을 끼다 정상미 요즘은 그렇다 외로워지고 싶어 팔장을 낀다 혼자서 팔짱을 끼는 것은 흔들리는 나를 내가 붙들고 가는 것이다 차가워지는 내가 싫어서 내가 나를 데우는 것이다 7년 사귄 애인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추스르려 팔짱을 낀다 박 팀장에게 서류뭉치로 얻어맞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을 때 기우뚱하지 않으려 팔짱을 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더 촘촘해진다 단단해진 팔짱은 애인에게 긁히고 팀장에게 찔려온 나를 지그시 눌러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도도해진다 눈에는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애인 같은 거 팀장 같은 거 별 거 아니라며 입을 앙다물고 깨진 어깨를 올린다 팔짱이 나를 밀고 간다 가끔은 조금 거만해 보여도 좋다 시작노트 언제부턴가 팔짱을 끼지 않으면 불안했다. 빈손은 날 ..

좋은 시 2024.02.17

질그릇 - 윤석산

​ 질그릇 - 윤석산 ​ 경주박물관 한 귀퉁이, 조명마저 다소 비켜간 자리 못생긴 질그릇 하나 놓여 있다. 본래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양 자리를 잡고 앉은 질그릇. 아무것도 보일 것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그저 그렇게 놓여져 있다.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요즘. 아무리 속 다 드러내놔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도 없는, 지지리 못난 질그릇 하나 세상 한 귀퉁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 尹錫山 시집『나는 지금 운전 중』 ​ 있는 속, 없는 속 모두 드러내놓고 살아야 그나마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속이 깊어 그 속을 다 들여다볼 수 없거나 속이 얕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그 속을 간파당하거나 간에, 어쩔 수 없이 속을 드러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쓰..

좋은 시 2024.02.12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

좋은 시 2024.02.11

멸치 - 김태정

멸치 - 김태정 ​ ​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 세상 가득하여, ​ 두 손 모아 네 몸엣것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까지 ​ ​ ​ ​ ​ ​ 올해 여름에도 삼계탕을 먹었다. 이 집 삼계탕은 참 부드럽고 쫄깃하다고, 땀 흘리며 뼈를 발라내며 말했다. 그 닭한테 뭐라고 해야 하나. 한평생 사는 동안 내 이빨이 씹은 ..

좋은 시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