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에 대하여 - 송진권
ㅡ 못골 19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시집 『자라는 돌』(창비, 2011) 중에서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아마 여름밤이었을 게다.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양푼’을 가운데 두고 일가친척들이 모였나보다. 요즘은 흔치 않은 평상에 보여 앉아 선선한 여름 밤 바람을 한 손으로 쓸어 담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겠지, 포르스름한 하늘도 지붕 가까이 기웃거리니 ‘마당에 그득히’ 별과 달도 함께 ‘마실’ 왔으리라.
그날 밤 그 마당에서의 일들이 어떤 말로도 부족하고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어서 별과 달을 바라보는 여름밤의 그 느낌을 시인은 ‘뭐라 말해야 하나’라는 표현으로 벅차오르는 정서를 수습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서 보기 힘든, 귀한 풍경들인 이런 것들.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
‘놓아먹이는 개들’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
‘그 저녁 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퍼붓는 졸음 속’의 아늑함으로…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쉿! 지그시 눈 감고 그냥 느끼기만 할 것!
<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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