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 - 이문재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있다
눈부시다.
소금 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염전이 있는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중에서
어른들은 왜 툭하면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어린 시절, 좀처럼 풀리지 않던 저의 궁금증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답을 알 것만도 같습니다. 어쩌면 간단합니다. 어제가 오늘보다 더 많아서 그런 것이겠지요.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아니면 옛일들이 무작정 찾아와 내 앞에 드러눕는 것인지 구별도 쉽지 않습니다. 사라지는 것과 잊히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었듯 떠오르고 다시 사무치는 일들 앞에서도 우리는 속절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일은 또 어떤 어제의 기억들이 불쑥 나를 찾아오게 될까요. 부디 마음으로 반길 수 있는 시간과 장면이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박준 시인
염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듯하고 소금창고 역시 그런 듯하다. 늦가을이다. 이 사람은 그때 젊었으나 지금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흔 살이 되었다. 마흔은 인생 전반이 끝나려 하거나 후반이 시작되려 하는 나이, 앞을 봐야 하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상한 나이다. 마흔이 되기 전부터 읽었는데 쉰이 넘어서도 자꾸 꺼내 읽게 되는 시.
시는 같은 구절들을 은은하게 반복하고, 짧은 시행 긴 시행들을 교차시키며 읽는 마음을 애잔하고 유려한 리듬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염전(소금창고)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바다로 가는 길’ 같은 구절들. 염전과 소금창고를 비롯하여 옛날 노래가 적힌 책, 마른 갈대꽃, 기우는 햇살 같은 사물들이 아련히 과거의 잔영을 느끼게 할 뿐 이 시에 인간의 사연은 드러나 있지 않다. 음악이 그러하듯 시의 리듬은 내용 없이도 우리를 설득해 버린다. 그래, 뭐라 말하기 어려운 그런 시간이 내게도 있었지….
이 시의 호소력은 화법에도 있다. 그 옛날 그 장소에 다시 와서, 이제 바뀐 풍경을 가늠할 뿐 다가서지 않는 이 사람은 입을 꿰맨 듯 말이 없지만, 사실은 눈으로 말하는 중이다. 지그시 힘을 주어 길 끝을 보며 한 번, 다시 핀 갈꽃에 눈부셔하며 두 번, 그리고 고개 들어 눈물을 떨어뜨리며 또 한 번. 시에는 시를 시로 만들어주는 ‘시의 눈’이 있다고 했거니와 이 시의 마지막 두 줄은 그에 값하고도 남는 듯한데, 이는 바로 저 세 번의 글썽이는 침묵이 낳은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어쩌면 온갖 찬란한 내일이 아니라 몇몇 희미한 옛날인지도 모른다.
이영광 시인
이문재 시인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등과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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