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갈지자로 우왕좌왕 십자 모양의 건널목을
헤매고 있다
두 눈이 끓고 있다
언젠가 맑았던 그의 두 눈이
네거리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중이다
뿌리를 비추다
아직 바람이 찬데
밝은 문들 조용히 귀 기울인다
온 마을 가득 두더지 떼가 몰려오나
흙의 내장들이 일어나 앉는다
파릇파릇한 얼굴들 밥풀만한 대가리들
땅의 새끼들도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겠다
수많은 말씀으로 손때 절은 골목길
뿌리들 웅성거리는 소리 가득하다
어두워져만 가는 텅 빈 제비집
그 샛노란 주둥이들은 언제 집을 찾을까
제비 기다리던 노인 하나둘 떠나가도
마라도 25마일까지 밝히는 등대보다
서해 5도와 황해의 42km까지 빛 쏘아주는
선미도 등대보다 더 거대한 등대가 땅속에는 있다
황토벌판이 온통 들썩들썩 맥놀이 한다
금방 지나가요
고추를 멍석에 뉘이고 다독이면서 어머니 생각
“하나님은…, 어찌먼 이리도…, 곡식 푹 익으라고 이렇게 좋은 날씨를
꼭 주셔야…, 그리 퍼붓다가도…, 안 그냐”
볼 일 없이도 핑계거리를 만들고 싶은 시월
태풍은 일본 쪽으로만 지나가리라는 예보
스마트폰에서는 가을 구름 콘테스트가 한창 벌어지는 중
나는 고양이처럼 화단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음
쓰레기 버리러 나왔던 앞집 아주머니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런 날씨 며칠 안 해요, 후딱 지나가요.”
고양이 한 마리 혀로 물을 맛있게 날름거리더니
조심스레 발까지 적셔보고
어둠 속에서 걸음을 더듬어 보듯
다리가 둥둥 떠가듯 물웅덩이를 사뿐히 건너
사철나무 뭉치 속으로 사라진 뒤
우주 어디쯤 바람 새끼 몇 헤매고 있을 저녁
해거름이 몰고 오는 바람결에 막 풀 먹인 어머니 치맛자락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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