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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는 힘이 세다 외

에세이향기 2024. 2. 27. 09:23

먼지는 힘이 세다 외

 

김은옥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갈지자로 우왕좌왕 십자 모양의 건널목을

헤매고 있다

 

두 눈이 끓고 있다

언젠가 맑았던 그의 두 눈이

네거리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중이다

 

 

뿌리를 비추다

   

 

아직 바람이 찬데

밝은 문들 조용히 귀 기울인다

온 마을 가득 두더지 떼가 몰려오나

흙의 내장들이 일어나 앉는다

파릇파릇한 얼굴들 밥풀만한 대가리들

땅의 새끼들도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겠다

수많은 말씀으로 손때 절은 골목길

뿌리들 웅성거리는 소리 가득하다

어두워져만 가는 텅 빈 제비집

그 샛노란 주둥이들은 언제 집을 찾을까

제비 기다리던 노인 하나둘 떠나가도

마라도 25마일까지 밝히는 등대보다

서해 5도와 황해의 42km까지 빛 쏘아주는

선미도 등대보다 더 거대한 등대가 땅속에는 있다

황토벌판이 온통 들썩들썩 맥놀이 한다

 

 

금방 지나가요

   

 

고추를 멍석에 뉘이고 다독이면서 어머니 생각

“하나님은…, 어찌먼 이리도…, 곡식 푹 익으라고 이렇게 좋은 날씨를

꼭 주셔야…, 그리 퍼붓다가도…, 안 그냐”

볼 일 없이도 핑계거리를 만들고 싶은 시월

태풍은 일본 쪽으로만 지나가리라는 예보

스마트폰에서는 가을 구름 콘테스트가 한창 벌어지는 중

나는 고양이처럼 화단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음

쓰레기 버리러 나왔던 앞집 아주머니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런 날씨 며칠 안 해요, 후딱 지나가요.”

고양이 한 마리 혀로 물을 맛있게 날름거리더니

조심스레 발까지 적셔보고

어둠 속에서 걸음을 더듬어 보듯

다리가 둥둥 떠가듯 물웅덩이를 사뿐히 건너

사철나무 뭉치 속으로 사라진 뒤

 

우주 어디쯤 바람 새끼 몇 헤매고 있을 저녁

해거름이 몰고 오는 바람결에 막 풀 먹인 어머니 치맛자락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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