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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는다는 것/권상진

에세이향기 2024. 2. 28. 13:29

접는다는 것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 『노을 쪽에서 온 사람』(걷는사람, 2023)

***

지난주 금요일 1박 2일로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포항의 문화공간 <책방 수북>에서 포항의 詩民들과 시와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식 행사를 마친 후에는 소설가 김강, 시인 최미경, 조각가 서동진, 눈깔사탕 외계인, 그리고 오늘 시를 소개하는 시인 권상진 등과 밤 늦도록 술과 담소의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권상진 시인은 지면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지요. 반가운 마음에 그의 시 한 편을 부려놓았습니다.

- 접는다는 것

시인들은 참 비슷한 족속들이지요.

다른 족속들이 보지 못하거나/않거나 혹은 외면하는 곳/것을 굳이 들여다보곤/들추어내곤 하거든요.

그리하여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뜻과 지평을 보여주곤 합니다.

다음의 시편들을 함께 읽어보시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박영희, 「접기로 한다」(『팽이는 서고 싶다』, 창작과비평, 2001) 전문

*

귀퉁이가 아니라 귀다

입술보다 더 많은 말을 간직한 귀

말없이 나를 읽어주던 귀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버리지 않는 귀

그러나 비밀을 옮기지 않을 귀

가볍지 않으나 너무 무겁지도 않은 귀

배신할 리 없는 귀

그래서 함께 여행 중이었던 귀

꿈과 상징으로 가득한 귀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비상할 수 있는 귀

손가락을 거는 대신

나는 그의 귀를 가만히 접는다

잠시 후에 다시 만나!

- 강기원, 「책장의 귀를 접다」(『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민음사, 2010) 전문

*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배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 박일환, 「귀를 접다」(『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전문

'접다'라는 동사 하나에 이러한 다양하고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시를 읽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접다'라는 하나의 단어가 같은 듯 다른 울림을 주지요.

시를 읽는 여러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24. 2. 26.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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