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 김해자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해자네 점집>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곡과 대지에 경배하며. 그 모든 계절의 바람과 떨어진 꽃과 주검들이여. (…) 밥과 술 그리고 웃음까지 나눠 먹는 이웃들과 친구들이 이 시들 중 몇 편이라도 듣고 껄껄 웃었으면 좋겠다.” 이 소박하고 진솔한 문장이 시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를 읽은 나의 소회를 대신해도 좋겠다. 푸르죽죽할 때에도 파릇파릇하게 수식해주는 사람, 가꾸어주는 사람이 우리의 곁에, 아랫집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할까. 맞들어주는 사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매일매일 애쓰느라 버거운 우리는 서로서로 맞장구도 쳐주고 달콤한 소리도 하자. 그리고 활짝, 꽃처럼 웃자.
문태준
다 저녁에 소리 풍년이네요. 슬래브 지붕 두드리는 빗소리만으로도 귓바퀴 쫑긋한데, 도마질 소리는 배꼽시계 알람이네요. 마을 언니 동생 모여 저녁상 차리며 창밖으로 번지는 말소리, 흰소리는 흰소리대로, 단소리는 단소리대로 귀로 먹는 성찬이네요.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라 해서 날만 저문 줄 알았죠. ‘달 몇 번 윙크하고 나믄 여든 살’ 운운하는 바람에 다 들켰어요. 늙도 젊도 않은 호박으로 전을 부쳤을까, 채를 썰어 볶았을까, 깍둑 썰어 된장국 끓였을까. 나이 들어도 호박 맛은 여전하죠. 군침이 꼴깍 목울대 아리랑 고개 넘어가는 저녁입니다.
<시인 반칠환>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0) | 2024.03.03 |
---|---|
물 묵어라 - 전동균 (0) | 2024.03.01 |
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0) | 2024.03.01 |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0) | 2024.03.01 |
비의 문양 - 윤의섭 (0) | 2024.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