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등불 - 청계천 시편 3―춘심이네 집 / 김신용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어 기대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울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 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맑은 미소의 바늘이 한 올 한 올
허망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터진 자리를 밟아 올 때마다
아무리 땀 흘려도 내 몸뚱이 하나도 채 적시지 못하는
나의 땀방울들이,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눌러 와
나를 더욱 남루의 노가리처럼 여위게 하곤 했지
바깥은 찬바람이 제 가고 싶은 데로 불고 있었고
담 밑의 지게들은 서로 몸 오그려 추위를 견디고 있었지만
노상 비틀거리는 것은 가난의 앙상한 형해(形骸)―, 그림자뿐인
귀로, 아무리 갈아도 자꾸만 돋아나는 쥐의 이빨처럼 취기가
또 하루의 발뒤꿈치를 야금야금 갉고 있을 때
그 가녀린 손길이 여며준 작업복은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풀잎처럼 떠올려 주곤 했지
그래, 거리 곳곳에 피어오르는 모닥불로
관절염을 앓고 있던 청계천의 그해 겨울
며칠 전,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불빛 하나를 떠올렸다. ‘그 불빛’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을 보았을 때였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빈한한 농촌 현실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암울한 잿빛의 그림에서 화사한 ‘색채’를 갖게 해준 ‘아를(Arles)’의 풍경들―, 그 풍경들 속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밤하늘의 별빛들을 표현한 색채가 온통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그 불빛’을 떠올렸다. 그래서 거의 버려두다시피 한 묵은 원고를 뒤져보았다. 그 속에서 「기억 속의 등불」이라는 제목의, 위의 시와 더불어 오래 전에 쓴 짤막한 글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글을 다시 읽어보는 순간, ‘그 불빛’은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있는 하나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참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기는커녕 더욱 선명히 떠오르곤 한다. 그 기억은, 먼 길을 가기 위해 찾아든 추운 겨울날 대합실의 따뜻한 난로 같은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어두운 밤 강 건너편의 불빛처럼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강의 어두운 물빛에 젖어 흔들리는 그 불빛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잿빛의 생의 밝은 ‘색채‘가 되어준다. 그 색채로 잿빛의 암울한 현실을 채색하게 해준다. 그래서 그 기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잊히기는커녕 더욱 선명히 떠오르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 속의 등불」이라는 제목의, 시작 메모 형식으로 쓰여 진 짧은 산문은, 서툴지만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 여기 옮겨본다.
<기억 속의 등불>
인간은 절박한 고난에 빠졌을 때, 신의 이름을 부른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하찮은 성냥개비 하나의 존재가 생명이 되어 다가온다.
부뚜막에 앉아,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바느질해주고 있는 모습, 어쩌면 찢겨지고 해진 우리들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비쳐졌는지 모른다.
그때, 청계천은 깨트린 술병으로 제 배를 북 그은 자해의 상처자국 같은 것이었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술꾼들의 까닭 모를 몸부림 같은…….
붉은 혀를 날름이며 폐부에 뱀의 문신으로 새겨지던 이유 모를 증오, 그러나 세상은 그 상처에 비웃음의 소금을 뿌렸고, 그리고 나는 그 쓰라림을 지게로 지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다 떨어진 인생에게 술은 등불이다. 먼 마을의 불빛처럼 뿌리 뽑힌 가슴이 속절없이 젖어들어 가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갈아도 자꾸만 돋아나는 쥐의 이빨을 가진> 이 취기, 이 ‘치자빛’ 취기의 송곳니가 발뒤꿈치부터 야금야금 갉아 끝내 척추마저 와르르 무너질 때까지 우리는 술이라는 불빛을 향해 자폭하는 날벌레 같은 존재들이었다.
춘심이네 집은 청계천 뒷길, 시장 안의 막다른 골목 끝에 있었다. 청계천 뒷골목의 흔한 가정집 부엌을 선술집으로 개조해서 만든 술청은, 싼 술값에 찢겨진 마음을 기워주는 춘심이의 착한 미소의 바느질로 해서 청계천을 떠도는 막벌이꾼들의 ‘메카’ 같은 곳이었다. 그 막다른 골목 안쪽에는 언제나 청계천 지게꾼들이 벗어놓은 지게가 서로 포개져 놓여 있곤 했다. 그리고 좁은 부엌 술청 안을 들어서면 벽에 널빤지로 술탁자를 만든 목로 위에 막걸리 잔을 놓고 막벌이꾼들이 선채로 술을 마시고 있곤 했다. 그 곁에서 춘심이는 늘 웃는 얼굴로 잔술을 따라주거나 부뚜막의 연탄불 위에 노가리를 구워 안주로 내놓으며, 그 부뚜막에 앉아 막벌이꾼들의 찢겨진 작업복이 눈에 띄면 스스럼없이 기워주곤 했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아 많은 막벌이꾼들이 제 집처럼 찾아 들곤 했다.
그때 그 술꾼들 사이에는 우리들이 안 씨라고 부르는 지게꾼이 있었는데, 그는 작업복의 주머니에 늘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청계천 주변에서 죽어간 동료 지게꾼들의 이름과 신상명세가 적힌, <사망명부>였다. 안 씨는 처음 청계천 지게꾼이 되면서부터 그것을 기록했다고 했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의 이름과 (물론 별명을 포함해서) 죽은 장소가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청계천변에서, 시장 좌판 곁이나 쓰레기 하치장에서, 혹은 세운상가 고가도로 밑의 구석진 곳에서 죽어간 그 죽음의 원인은 한 마디로 ‘술’이었다고 안 씨는 자조어린 결론을 짓곤 했다. 그때의 청계천 지게꾼의 죽음을 묘사한 시가 있다. 나의 데뷔작 중의 하나인 「미운 오리새끼」이다.
그는 죽었다. 세운상가 육교 밑,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엎드려서
개처럼.
곁엔 지게 하나가
다 부서져가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빈 술병과 라면과자 껍질만
그의 부랑의 넋이듯 굴러다니고 있을 뿐
―지게꾼 아냐.
―알콜중독였던 게로군. 밤새 술과 자다가 행복하게 복상사했구만.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이 걸려 있는 육교 난간의 판넬화 속에서
제복의 비둘기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 화창한 봄날의 얼굴에 웬 작자가 침을 뱉아, 하는 표정으로
사진기의 셔터가 눈을 흘겼다. 네가필름의 침묵이 여러 각도에서, 죽음을 봉인해 버렸다
아침 해가 구름 뒤로 살짝 숨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주검 위에 가마니가 덮이자
얼른 나와 햇살의 조화 몇 송이를 떨어뜨리고는 잠시 묵념하는 척 했다.
곧이어 앰뷸런스가 아이고 아이고 哭의 경적을 울리며 왔다가
행려병자 사망 확인서를 꼬리표로 단 소포가 되어 어디론가 배달되어 가버리고
지게만 홀로
관절 마디를 꺾는 적막을 이 악물고 견디고 있었다.
「미운 오리새끼」 전문.
미운 오리새끼가 나중에 백조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운 오리새끼일 뿐인 현실, 그 암울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그 죽음의 원인인 ‘술’을 찾아 해만 지면, 아니 어떤 날은 해장술을 찾아 아침부터 춘심이네 집을 찾곤 했다. 그렇게 내가 취해 비틀거릴 때면 안 씨는 그 사망명부를 꺼내 보이며 “우선 여기 가등록 해 놓을까?” 하며 웃음 섞인 농담을 던져오곤 했다. 그도 머지않아 자신의 사망명부 속의 이름으로 사라져 갔으면서도…….
그때 나는 어쩌면 그렇게 춘심이네 집을 찾아 갔을까? 일부러 작업복의 옆구리를 북 찢어서라도 바느질을 당하고 싶어 했을까?
춘심이는 고아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 어디에도 고아라는 그늘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열일곱 살인 ‘흰솜털 보송송한’ 모습은, 우리들의 찢겨진 자리를 제 상처처럼 바라보던 얼굴은, 진흙탕 속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바퀴 같은 내게 하나의 충격처럼 다가왔고, 그것을 멈추어주는 급브레이크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 어떤 날은 대낮부터 그 집을 찾아들곤 했다. 그리고 목로에 서서 혼자 막걸리 잔을 비우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그리고 그때, 내 지게에는 시집이나 철 지난 묵은 문예지 같은 것들이 어쩌다 꽂혀 있곤 했었는데, 그것은 청계천의 헌책방 앞을 오가다 구한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펴보기도 하면서 혼자 술을 마실 때면, 춘심이는 내가 읽는 책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시집이나 소설 문예지 같은 것을 춘심이에게 읽어보라며 건네주곤 했다. 그러면 춘심이는 활짝 웃으며 무슨 소중한 선물이듯 그 책을 받아들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아 다음 날이면 또 찾아들곤 했다. 나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춘심이네 집을 찾아들었었다.
그리고 그때, 부뚜막에 앉아 잔술을 팔면서,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곤 하던 춘심이의 바느질―.
그것은 현대라는 이름의, 파편화된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이 팽배해 있는 이 도시적 삶이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 삶의 본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런 우리네 삶의 본질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땀 흘려도 나 하나만의 몸뚱이도 채 적시지 못하는 이 땀방울은 무엇인가? 이 땀방울의 의미는 정말 무엇인가?
춘심이의 바느질―,
오늘도 어두운 밤길을 걷다보면 문득 그것이 떠오르곤 한다. 마치 강안(江岸)의 불빛처럼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부끄러움에 젖곤 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무엇의 불빛이 되어주고 있었을까? 무엇의 불빛이 되고 싶었을까?
그래, 내 삶이 너무 무거워 다른 삶들에게 눈을 돌릴 틈도 없었던, 생의, 그 척박한 삶의 ‘색채’가 되어주었던, 그 불빛―.
나를 오늘도 부끄러움에 젖게 하는, 그 불빛―.
지금도 내 기억의 서랍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과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 1,2』『기계 앵무새』 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 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올해의좋은시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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