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이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 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 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 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가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과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문장웹진 6월호>
빼고 보탤 더 이상의 무슨 수식이 필요하겠는가.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오랜 고임의 고요와 눈 감고도 읽혀지는 거대한 이미지의 창고가 바로 눈앞에 있거늘. 연잎들이 당나귀 귀처럼 펄럭일 연지를 찾아 오감으로 느낄 일이다.
경주 서출지, 안압지, 밀양 위양지, 청도 유호연화 어디든 산천이 은밀히 숨겨놓은 연지를 찾아 가면 유월의 짙푸른 녹음 속에 동양화 한 폭 펼쳐 놓은 듯 500여년 전 서사의 꾸러미를 연상할 수 있다. 보름달이 이우는 신새벽 은반 같은 수면 위에 뗏목을 타고 노니는 학 같은 선비의 은일이 떠오른다. 덩기덩 거문고 소리에 시를 읊으며 사색당쟁의 티끌 같은 세상사를 잊고자 했을 지도 모를 일.
까닭없이 분주한 세상, 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에 드는 고승처럼 깊어지거늘 인간다움을 위해 내면을 거울처럼 비춰보는 앉음새가 곧 결가부좌다. 이 자리 저 자리 꼴사납게 기웃거리지 않는 품격 있는 정좌야 말로 한국적 교범이 아니던가. 자연은 무언으로 가르치는 고전. 누렇게 빛바랜 두루마리 화선지를 펼치듯 시인은 육자배기 가락으로 풀어내고 있다.
류윤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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