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문양 - 윤의섭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른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른 神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뿌려져 이미 잠들었다
발을 디디고서야 빗방울은 최초로 신음한다
이 기나긴 침묵으로 흐린 하늘 가득하다
구름을부터 그어진 무수한 여정으로 흐린 하늘 슬츠다
오직 고요의 춤만이 허락된 비행으로 흐린 하늘 눈부시다
지상을 저시며 빗방울은 비로소 몸을 묻는다
천구를 가로질러 온 경로다
계간 『딩아돌하』 2011년 가을호 발표
시인에게 빗방울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인은 빗방울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시인은 이렇게도 세부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느낀다. 시인은 <묵시록>이나 <사진전>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고 구원과 좌절을 사색한다. 습기가 뭉쳐져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빗방울은 시인에게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구름 위에서가 아니라 구름의 수준으로부터 떨어지는 빗방울의 추락에서 우리 인간의 슬픔을 생각한다.
시인에게 빗방울은 대지의 메마름을 적셔주는 고마운 대상으로서의 그것도 아니다. 빗방울은 떨어지면서 휘도는 성운을 보기도 하고, 바람소리 속에서 창공에 가득 흘러넘치는 신의 음성을 듣기도 하지만, 살점을 떼어내는 살생의 속도에 의해 스스로 미쳐간다. 그런데도 자신이 어떻게 왜 미쳐가는지 이유도 까닭도 모른다. 빗방울은 슬프게도 구름 이상의 하늘로 솟구쳐 오를 수 없는 운명이다. 빗방울은 추락할 수밖에 없는 필연 속에 탄생한다. 그 서글픈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대지에 닿기까지의 짧은 생애동안 울 수조차 없다. 대지에 닿고 나서야 빗방울은 눈물 흘리게 된다.
빗방울은 대지에 닿자마자 자신의 친구들과 한 몸이 되어 시냇물이 되어 흐른다. 그리고 그 시냇물은 시간의 엄연함 속에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데, 더 이상 빗방울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형체를 잃은 채 눈에도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시인의 사색은 거기까지에서 끝난다. 시인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빗방울이 대지에 묻히는 순간에서 사색의 끝을 낸다. 그에게 빗방울은 바로 딱 거기까지인 운명이다. 그다음부터는 빗방울이 아닌 셈이다. "비"는 글자의 생김부터가 아래로 흐르는 문양이다. 비의 문양은 그렇게 생겼을 뿐이다. 그것이 운명이다.
그 짧은 순간에 빗방울이 아무리 근원을 탐색한다 하더라도 근원은 실마리조차 잡히지도 알 수도 없다. 시인은 빗방울이라는 사물을 통해 깊이 있는 사색을 함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유한성의 슬픔을 통해 무한성과 영원의 실마리를 잡아보려 한다. 그러나 유한성의 사물에게 무한성의 근원은 쉽게 알려지지 않는다. 초월과 구원은 빗방울과 같은 우리에게 쉽게 다가서기 힘든 어떤 세계인지도 모른다. 단지 무한의 근원 앞에서 우리는 소리 죽여 울거나 뭔가를 간구할 뿐이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비애감을 느낀다. 그런 약한 실존으로부터 시인은 우리 인간이 두려움과 떨림의 존재라는 사실을 통감한다.
작성자 Son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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