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조개의 꿈/김추딘

조개의 꿈 김추인 갯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 묵黙 묵黙 적寂 묵黙 ​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불러온 업보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조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ㅡ시집『오브제를 사랑한』(미네르바, 2017) ------------------------------ 조개의 꿈 -생명의 환(幻) 김추인 갯 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

좋은 시 2024.01.11

민어회/안도현

민어회 안도현 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르겠으나, 나는 곧장 목포 유달산 밑으로 가서 영란횟집 계산대 앞에 민어 한 마리로 누워 있겠다 벗겨 손질한 껍질 옆에다 소금 종지를 두고 내장을 냄비에 끓여 미나리도 반드시 몇 가닥 얹겠다 혹여 전화하지 마라 올 테면 연분홍 살을 뜨는 칼처럼 오라 바다의 무릉도원에서 딴 복사꽃을 살의 갈피마다 켜켜이 끼워둘 것이니 때로 살다가 저며내고 발라내야 할 것들 때문에 뼈는 아리지 그래도 오로지 뼈만이 폭풍 속에 화석을 새겨넣지 그러므로 당신은 울지 마라 소주병처럼 속을 다 비워낸 뒤에야 바닷가 언덕에 서서 호이호이 울어라

좋은 시 2024.01.01

삼계탕/ 권오범

삼계탕/ 권오범 수컷 구실 한번 하지 못하도록 애당초 몽달귀로 낙인 찍혔다지만 천명이 턱없이 에누리당해 얼굴마저 저당잡혀 볼썽사납다 행여 머나먼 저승길 허기질세라 대추 밤 찰밥 미리 얻어 먹고 지옥 물에 목욕재계하고 나니 골수마저 녹아내려 온몸이 녹작지근하다 어린 것이 다리 꼬고 누워 인삼 하나 끌어안고 남세스럽게 누드쇼는 하지만 버젓한 한류스타이기에 여한은 없다 저승사자인 인간들이여 마지막 가는 길 부탁 하나 하자 젖가락으로 잔인하게 꼬집어도 좋으니 뼈 마디마디 깔끔하게 추려 해탈시켜다오.

좋은 시 2024.01.01

감꽃 1 / 양현근

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

좋은 시 2023.12.29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쇠똥구리 아젠다 / 김영찬 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태어난 나는 서사성 짙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밤잠을 거른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쓴 글 높새바람에게 던져주고 남은 날숨을 구름옥상 위에 방치한다 까막까치가 날아와서 불순물 섞인 운문을 쪼아 먹으리 역사상 가장 힘들게 고고한 자태로 버텨야 하는 나는 내가 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연필심에 침을 바른다 -김영찬 시집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중 나는 더욱 소중하다. 이 세상 올 때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지 않았을 것이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귀한 존재로 살아가라 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귀함을 잘 모른다.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를 무시하거나 때로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모르는 세상, 밤잠을 이루..

좋은 시 2023.12.29

굴참나무 자서전/신영애

굴참나무 자서전 =신영애 기억을 지우니 바람이 분다 요양원 뒤뜰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통나무 의자들 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무뎌진 감정이 진물 흐르는 사연을 훔치고 있다 마음이 머물지 않아도 집이 될까 힘겹게 옮겨진 몸에는 세풍을 견딘 흔적이 옹이로 자리 잡았다 어스름한 산마루에 머무는 시선 노을이 잦아들자 산 그림자 길다 어느 서고에 한자리 차지하고 뿌리 깊은 수령을 전하고 싶었지만 골만 깊어진 몸뚱이는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재생을 멈춘 세포들은 사라지고 있다 다만 꿈결에 스치던 바람과 무성했던 온기와 산불과 병치레와 뿌리까지 흔들던 태풍을 마른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소멸을 위해 버티는 곳 아프지 않아도 아픔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풍장으로 사라질 날까지 끝내 그의 거처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시 2023.12.29

두부 이야기/정끝별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 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 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

좋은 시 2023.12.29

몸의 기억력/이주언

몸의 기억력/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 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 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 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 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 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 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 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 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시감상) 어느 때는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오랜 습관이나 몸에 익어버린 기억이나 손길, 할..

좋은 시 2023.12.29

나의 손 / 최금진

나의 손 / 최금진 나는 어느새 늙었고, 내 손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누군가를 만나면 뒷짐을 지거나 짐짓 팔짱을 낀다 내 과거는 토굴이었고, 손바닥은 언제나 더러운 때가 끼어 있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이웃들의 당돌한 악수가 무서웠다 나는 아픔이 아픔인 것을 모르던 어린놈이었다 소금 반찬으로 밥을 먹고, 혼자 학교에 갔고 학교에선 숙제를 안 해온 죄로 손바닥을 맞고 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 나를 계집애라고 놀렸었다 이제 그 손이 늙은 것이다 찌릿찌릿 경련도 오고, 각질이 때처럼 일어난 손이 어느 날, 맥없이 늙어버린 것이다 노란 단무지 같은 얼굴로 혼자 몸살을 앓다가 나를 사랑할 이유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때 남에게 싹싹 빌던,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렸던 내 손이 곁에 누워 나를 쓰..

좋은 시 2023.12.27

말/김지란

말 -만성위염 속이 쓰리다 마음이 앉을 자리가 없어 더 쓰리다 의사는 내 속을 도통 모르겠다며 내시경으로 들여다보자고 한다 첨단 의료기기 앞에서 음흉한 속이 들킬까 공손해진다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도착한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 내 몸 중심을 차지한 지척의 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거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들이켜는 술잔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벌겋게 물들인 속을 의사는 단풍이 들었다고 했다 오랜 시간 알아달라고 얼마나 숨죽여 울었던 건지 이유 없이 열이 나고 온몸이 떨렸던 적도 내게 온 만개한 가을을 알리는 위급한 신호였다 통증을 키우는 나는 단풍나무 관리인 그 사람이 던지고 간 인연이라는 말을 아직도 놓지 못해 사무치는 핏빛으로 단풍이 들면 한 세상 함께 건너가야 한다 [출처] 12..

좋은 시 2023.12.22

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 ​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번번이 앓아누웠다 ​ 당신이 망치와 날랜 정을 들고 들어설 때 나는 삼학도를 바라보며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층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 ​ 맨머리로 하늘을 받들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 슬픔을 가려 줄 갓 하나 갖고 싶은 마음이, 어찌 당신만의 일이겠는가 연대기를 따라 단단한 침묵을 쪼아내는 손끝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늑골에 스미는 한기와 통증을 견뎌야만 했느니 ​ 바람조차 뼈와 살을 헐어냈다 패인 곳마다 고여 드는 울음 계절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빛은 발끝을 세우며 다녀갔다 눈뜨지 못하는 방향 끝으로 파도가 들이쳤다 ​ 더는 무엇이 남아있지 않은 순간까지 붉은빛 쏟아내는 노을을 보며 사라져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 피멍 든 ..

좋은 시 2023.12.20

신발의 꿈 / 강연호

신발의 꿈 /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발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온 기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도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

좋은 시 2023.12.16

숫돌 / 도복희

숫돌 / 도복희 칼날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물을 적당히 축이고 일정한 리듬과 손목을 통해 가해지는 힘이 필요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과 몸이 섞이며 만들어 낸 날 선 눈빛으로 아침이 싹둑 잘려 나간다 잘려나간 아침들이 오래된 공복을 든든하게 채우리라 받아들일 때마다 얇아지는 살들의 쓰린 기억을 잊고 내 몸은 늘 똑같은 자세로 너를 향해 눕는다 닳고 닳는 것이 내 길이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면 내 전부를 내어주며 빛나는 너만을 지켜보겠다 날 선 날이 지나갈 때마다 온 몸으로 토해내는 소울음 노래로 들릴 때까지 나, 부동의 자세 바꾸지 않겠다 검은 눈물이 앞강을 채우고 움푹 패인 유방암 환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해도 네가 지나간 그 시간의 기억으로 즐겁게 우주를 떠다니고 싶다 바람이 되고 물이 ..

좋은 시 2023.12.13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 ​ 우포늪 둔치 만개한 저 여자 일생의 바닥 축축하다, 참고 견딘 오욕이 참 오래도록 삶을 삭혔겠다 스물여섯 신혼의 단꿈 채 익기도 전에 돈 벌어 오겠다며 집 나가 딴 살림 차린 사내 때문만은 아니리라 고딩잽이* 삼십 년 목숨이란 것도 늪 바닥만큼이나 시리고 깊은 것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 이제 대학교 졸업반 된 딸아이가 흰 날개를 저어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르기만 기다리는 저 여자, 설한雪寒의 바람 미쳐 날뛰어도 검은 잠수복을 입고 늪 가운데 서서 찬밥덩이 김치 몇 쪽으로 씹어 삼키며 너럭지** 가득 고딩이를 잡아 담았다지 어둠 밀려올 때서야 빙점의 물 헤치고 나오면 살 속 뼛속 서릿발 같은 통증이 우당탕탕 관절을 무너뜨려 한참이나 눈보라 속에 시커먼 죽음의 실타래를..

좋은 시 2023.12.12

칼잠 / 최일걸

칼잠 / 최일걸 ​ ​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2023.12.12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 ​ 되돌려박기엔 너무 늦었지만 보트피풀처럼 막막한 날들을 노루발로 고정시키고 터져 나오려는 절규부터 박음질해 아버지 나라에서 온 한국인 사장이 재단한 하루를 쫓아 재봉틀을 돌리며 겉감에 안감 달고, 끝끝내 들키지 않는 한반도를 속감으로 솜뭉치 사이에 끼워 넣지 한국인 사장의 빈틈없는 눈길이 줄자처럼 치밀하게 내 움직임을 체크해도 골무처럼 단단히 오므린 채 사장의 매서운 가위질에도 상처 입지 않게 호지명루트처럼 바느질 선을 감춰 한국인 피가 섞였다고 말했을 때 한국인 사장은 잠시 들킨 것처럼 움찔하더니 38선보다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 실패에 감긴 시간은 쉽게 풀리지 않지만 빳빳하게 깃을 세우고 소매단을 달고 속주머니 깊숙이 끝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찔러 넣으면 폐기 처분..

좋은 시 2023.12.12

국수를 말다 / 최정란

국수를 말다 / 최정란 택배로 관棺 하나가 배달되었다. 삼 킬로그램의 진혼곡을 개봉한다. 잘 건조된 미라들, 종이 수의 안에 빼곡히 몸을 눕히고 있다. 손에 집히는 시신 몇 구 끓는 물 속에 던져넣는다. 수장이다. 물에서 났 으니 물로 돌아가라. 아득한 남해 바다 죽방렴의 기억이 은빛 지느 러미를 꿈틀거린다.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출렁거리는 삶 의 파도소리를 실토한다. 한참을 뼛속깊이 뜨거운 절망 속에서 펄펄 끓었을까. 한 방울의 비린 심연까지 다 쏟아내고 거품으로 끓어오르 는 주검을 건져낸다. 얼마나 오래 영혼을 우려내며 국수발처럼 살아 야 하나. 남의 생의 내력에 잔치국수를 만다. 멸치국물에 국수를 잘 말던 그를 우려낸 연못에 그 해 유달리 큰 연꽃이 피었다

좋은 시 2023.12.12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책상서랍을 정리하다보면 책상의 前生이 보인다 책상 표면에 매끄럽게 그려진 결마다 뿌리와 가지의 힘이 모여 있다 나이테로 몰려든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던 힘들이 물을 빨아올리던 뿌리의 힘들이 나무의 옹이를 향해 제 몸을 둥글게 구부려 단단한 우주를 만들고 있다 중력을 떨치며 태양을 향해 방사선으로 피어나던 잎들이 숲을 지탱하던 나무들이 결국은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밤마다 책상에서 뿌리들이 뻗어 나와 오래된 기억들을 점자책처럼 더듬어 읽어간다 책상모서리마다 나사못들이 단단하게 조여져 있다 맞닿은 곳마다 숲의 온기가 생생하다 내 방엔 결가부좌한 책상의 前生이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살고 있다 밤새 먼지 내려앉은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면 단단하게 조립된 생나무들의 숨결이 별에 닿고..

좋은 시 202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