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력/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
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
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
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
배를 쓸어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
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
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
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
그들은 내 몸속에 욱신거리며, 있다.
(시감상)
어느 때는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오랜 습관이나 몸에 익어버린 기억이나 손길, 할머니의 거북 등껍질 같은 손바닥이 등을 쓸어줄 때면 문득 잠에 들어 안드로메다로 간 기억들, 어쩌면 본능과도 같은 기억의 편린들 속에 진정한 내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몸의 기억력은 가식이 아닌 진실이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지루한 날이 연속될 때 몸이 간직한 기억을 꺼내 보자. 알몸의 나를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른 봄 목련의 처음 개화를 본 것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을 새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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