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만성위염
속이 쓰리다
마음이 앉을 자리가 없어 더 쓰리다
의사는 내 속을 도통 모르겠다며
내시경으로 들여다보자고 한다
첨단 의료기기 앞에서
음흉한 속이 들킬까 공손해진다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도착한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
내 몸 중심을 차지한
지척의 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거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들이켜는 술잔에 감쪽같이 스며들어
벌겋게 물들인 속을
의사는 단풍이 들었다고 했다
오랜 시간 알아달라고
얼마나 숨죽여 울었던 건지
이유 없이 열이 나고 온몸이 떨렸던 적도
내게 온 만개한 가을을 알리는
위급한 신호였다
통증을 키우는 나는
단풍나무 관리인
그 사람이 던지고 간
인연이라는 말을 아직도 놓지 못해
사무치는 핏빛으로 단풍이 들면
한 세상 함께 건너가야 한다
[출처] 12월의 초대 시인 2 / 김지란|작성자 마경덕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의 기억력/이주언 (1) | 2023.12.29 |
---|---|
나의 손 / 최금진 (1) | 2023.12.27 |
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1) | 2023.12.20 |
신발의 꿈 / 강연호 (0) | 2023.12.16 |
숫돌 / 도복희 (0) | 202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