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를 반조返照하다 / 김휼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서 번번이 앓아누웠다
당신이 망치와 날랜 정을 들고 들어설 때 나는 삼학도를 바라보며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층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
맨머리로 하늘을 받들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 슬픔을 가려 줄 갓 하나 갖고 싶은 마음이, 어찌 당신만의 일이겠는가 연대기를 따라 단단한 침묵을 쪼아내는 손끝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늑골에 스미는 한기와 통증을 견뎌야만 했느니
바람조차 뼈와 살을 헐어냈다 패인 곳마다 고여 드는 울음
계절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빛은 발끝을 세우며 다녀갔다
눈뜨지 못하는 방향 끝으로 파도가 들이쳤다
더는 무엇이 남아있지 않은 순간까지 붉은빛 쏟아내는 노을을 보며 사라져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피멍 든 손톱 끝에 붉은 달이 뜨던 날 물속 깊이 뿌리내린 마음 돌이키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깊은 곳에 있는 우긋한 둘레를 내어주기로 했다
풍상 속 변이가 반조返照를 거드는 곳
모진 바람 끝에서 피어나는 기이한 풍화혈, 그 뜨거운 심연 속에 소금꽃 이야기는 가득 채워두었나니
이제 당신, 오래된 관절을 풀고 힘찬 걸음 내딛고 오시라
홍어 먹는 날 / 박소미
혀를 홍어에 바친 하루다
볏단처럼 비가 깔리고 왕겨 빛 시집 펼치면
개펄보다 캄캄한 길을 지나는 타자의 발굽소리 다가온다
비릿한 바다 한 귀퉁이 썰어 혀에 얹는다
대책없이 엥기는 차진 문장, 등골이 서늘해지는 은유는 징하다
귓속 가득 진한 암모니아 향 천둥 친다울대에 걸린 기억도 시굼하다*
어둑한 파도를 끌고 서늘한 물살 견디며 축축한 골방으로 숨어드는 홍어
꼬리 흔들면 뿌옇게 일어나는 뻘 같은 입말 가라앉을 때 까지
마음 항아리에 지푸라기 반 모춤 얹고 삭힌 매옴한* 뒷맛
아직도 발효 중이다
적막도 질겅질겅 씹으면 얼쩍지근한* 맛이 난다
구뜰한* 자서는 애탕 한 그릇, 옛말의 풋내는 보리싹처럼 뜨겁고 개안하다
사발 앞에 놓고 듣는 비긋는 소리는 이 빠진 뚝배기를 물고 있다
배고픈 자식 고향 떠나는 새벽 밥 지으며 듣던 소리처럼
마음의 혀를 쏜다
새침해진 별도 달시큰한 밤
나는 개미진 맛에 그렁그렁 귀를 맑힌다
시인은 죽어서야 웃는 홍어다
*시굼하다:깊은 맛이 잇게 조금 신 맛이 있다
*매옴한:혀가 조금 알알할 정도로 맵다
*얼쩍지근한:음식의 맛이 약간 달면서도 얼얼한 느낌이 있다
*구뜰한 :변볂지 않은 음식의 맛이 제법 구수하여 먹을 만하다
홍어 삼합 / 이용호
맨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오랜 시간 속에 울창한 미래가 숨어 있을 것이라곤, 썩어 빠진 육체에서 아름다운 겸손이 피어나요 깊은 바다 속에서 원시의 생명력을 갖고 태어날 때도 몰랐던 사실, 찬란한 것은 결국 내 안에 있음을, 육지와의 궁합이 이렇게 잘 맞을 줄 알기나 했을까요 사랑도 오래 가면 새롭게 발효될 것인데 톡톡 튀는 숨결의 울림이 온화하게 해져가는 흑산도 벼랑 그 파도에 부서져 가요.
백정의 칼을 온몸으로 받을 때였어요 아득하게 삶겨지고 토막 났을 때 이 상처는 누가 감싸줄 수 있을까 고민했지요 순간순간 패전을 향해 나아가는 장수의 칼끝은 어떤 모습일까 헤아리기도 전에 제 꿈은 솥단지에 걸렸어요 활 모양 휘어드는 시간의 결들이 서둘러 꿈을 꿀 때 절망은 그 어느 곳에서도 산화되지 않았어요 뜨거운 불길이 올라오는 그때마다 열기는 매번 사랑으로 변해가고, 혼자서는 꿈을 잉태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비릿한 미각도 어울릴 때 서로를 감싸 줄 수 있음을, 세상은 감싸야 살 수 있음을.
시장의 모퉁이에서 속절없이 시간이 둥글어질 때. 아직 실현되지 못한 꿈들이 항아리에 담겨 울고 있어요 공존할 수 없었던 바다와 땅의 장엄함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려면, 입 안에 꿈이 들어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지 생각해 봐요 하루하루 익숙함의 기운이 새벽마다 은빛 테를 두른 채 빛나고 있어요, 그런 계절이었어요.
우리는 깊은 사원처럼 익어가요. 북극칠성이 깜박이는 곳에 집어등으로 수놓은 아슬한 공존, 사람들은 그 경계에 와서야 옷깃을 여밉니다 바다와 땅과 짐승들을 순하게 만들어 한층 아름답게 배열한 접시 위. 그 위에서 누군가 우리들을 모을 때였어요 바다의 꿈이, 땅에서의 소망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힘차게 용틀임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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