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우포늪 둔치 만개한 저 여자
일생의 바닥 축축하다, 참고 견딘 오욕이
참 오래도록 삶을 삭혔겠다
스물여섯 신혼의 단꿈 채 익기도 전에
돈 벌어 오겠다며 집 나가
딴 살림 차린 사내 때문만은 아니리라
고딩잽이* 삼십 년
목숨이란 것도 늪 바닥만큼이나 시리고 깊은 것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
이제 대학교 졸업반 된 딸아이가
흰 날개를 저어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르기만 기다리는
저 여자, 설한雪寒의 바람 미쳐 날뛰어도
검은 잠수복을 입고 늪 가운데 서서
찬밥덩이 김치 몇 쪽으로 씹어 삼키며
너럭지** 가득 고딩이를 잡아 담았다지
어둠 밀려올 때서야 빙점의 물 헤치고 나오면
살 속 뼛속 서릿발 같은 통증이
우당탕탕 관절을 무너뜨려 한참이나 눈보라 속에
시커먼 죽음의 실타래를 풀어놓곤 했다지
오도독 이를 갈며 아아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다 되뇌던 삶의 바닥
늪보다 깊은 그 심연 퍼 올리다
왈칵 쏟아버린 하늘의 붉은 마음이
저 자줏빛 꽃구름 아니겠느냐
절망의 바닥을 기어본 사람만이 피울 수 있는 꽃
축축해서 등 마를 날 없는 우리 삶에도
한 번은 자줏빛 환한 꽃구름 필 날 있을 거라 말하는 걸까
붉은 너럭지를 밀며 우포늪 봄빛 속에
숨비소리 같은 긴 휘파람 풀어놓는
저기 저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 붉은 자운영
* 우렁이 잡이를 이르는 경남지역 말.
**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둥글넓적한 그릇. 큰 대야 또는 함지박을 이르는 경남지역 말.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발의 꿈 / 강연호 (0) | 2023.12.16 |
---|---|
숫돌 / 도복희 (0) | 2023.12.13 |
칼잠 / 최일걸 (0) | 2023.12.12 |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1) | 2023.12.12 |
국수를 말다 / 최정란 (1) | 2023.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