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칼잠 / 최일걸

에세이향기 2023. 12. 12. 03:14

칼잠 / 최일걸

 

 

칼잠을 자 본 사람은 알고 있다

삶이 얼마나 마모되어야

잠이 번득이는 날을 세워 칼에 이르는 건지

녹슨 양철지붕 같은 밤,

어떤 폭압이 저들을 협소한 공간에 몰아넣어

포화상태에 이르게 한 걸까

꿈마저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이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생의 갈피갈피를 비비며

칼갈이를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잡이를 꿈꿔보지 못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아 온돌이 되어

아랫목을 넓혀 가며

아궁이 보다 깊게 서로의 속을 헤아린다

부지깽이 같은 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다 보면

군감자 보다 더 따스해서

입김 호호 불며

한 덩어리가 된 삶을 나누어 먹는다

겹겹의 칼날을 이룬 그들이

허기의 단속을 피해

곤한 잠으로 풀어지려면

무허가의 밤은

도대체 얼마나 울음을 삼켜야 할까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숫돌 / 도복희  (0) 2023.12.13
자운영, 저 여자 / 배한봉  (1) 2023.12.12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1) 2023.12.12
국수를 말다 / 최정란  (1) 2023.12.12
전생前生을 생각하다 / 서안나  (1) 202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