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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숫돌 / 도복희

에세이향기 2023. 12. 13. 09:19

숫돌 / 도복희

 

칼날이 지나가기 위해서는 물을 적당히 축이고

일정한 리듬과 손목을 통해 가해지는 힘이 필요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몸과 몸이 섞이며 만들어 낸

날 선 눈빛으로 아침이 싹둑 잘려 나간다

잘려나간 아침들이 오래된 공복을 든든하게 채우리라

받아들일 때마다 얇아지는 살들의 쓰린 기억을 잊고

내 몸은 늘 똑같은 자세로 너를 향해 눕는다

닳고 닳는 것이 내 길이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면

내 전부를 내어주며 빛나는 너만을 지켜보겠다

날 선 날이 지나갈 때마다 온 몸으로 토해내는 소울음

노래로 들릴 때까지 나, 부동의 자세 바꾸지 않겠다

검은 눈물이 앞강을 채우고 움푹 패인 유방암 환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해도 네가 지나간 그 시간의

기억으로 즐겁게 우주를 떠다니고 싶다

바람이 되고 물이 되어 산천 구석구석

가벼웁게 휘돌아칠 수 있는건 사각의 한 생애,

너를 위해 고스란히 내어놓은 결과이다

살과 뼈로 남아 너와 쉼없이 부대꼈기 때문이다

징그럽고 품안으로 파고들던 칼날도 늘

똑같은 자세로 나를 향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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