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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에세이향기 2023. 12. 12. 03:06

라이따이한 재봉사 / 최일걸

 

 

되돌려박기엔 너무 늦었지만

보트피풀처럼 막막한 날들을

노루발로 고정시키고

터져 나오려는 절규부터 박음질해

아버지 나라에서 온 한국인 사장이

재단한 하루를 쫓아 재봉틀을 돌리며

겉감에 안감 달고,

끝끝내 들키지 않는 한반도를 속감으로

솜뭉치 사이에 끼워 넣지

한국인 사장의 빈틈없는 눈길이

줄자처럼 치밀하게 내 움직임을 체크해도

골무처럼 단단히 오므린 채

사장의 매서운 가위질에도 상처 입지 않게

호지명루트처럼 바느질 선을 감춰

한국인 피가 섞였다고 말했을 때

한국인 사장은 잠시 들킨 것처럼 움찔하더니

38선보다 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

실패에 감긴 시간은 쉽게 풀리지 않지만

빳빳하게 깃을 세우고 소매단을 달고

속주머니 깊숙이 끝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찔러 넣으면

폐기 처분된 나를 발견하곤 하지

내게 있어 한반도는 바늘구멍이나 마찬가지지만

내 손을 거쳐 간 의복은 한반도에 이르러

누군가의 몸에 걸쳐져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에

박봉과 격무와 멸시에 시달려도

멈추지 않고 재봉틀을 돌리고 있어

라이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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