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참나무 자서전
=신영애
기억을 지우니 바람이 분다
요양원 뒤뜰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통나무 의자들
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무뎌진 감정이 진물 흐르는 사연을 훔치고 있다
마음이 머물지 않아도 집이 될까
힘겹게 옮겨진 몸에는
세풍을 견딘 흔적이 옹이로 자리 잡았다
어스름한 산마루에 머무는 시선
노을이 잦아들자 산 그림자 길다
어느 서고에 한자리 차지하고 뿌리 깊은 수령을 전하고 싶었지만
골만 깊어진 몸뚱이는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재생을 멈춘 세포들은 사라지고 있다
다만
꿈결에 스치던 바람과 무성했던 온기와 산불과 병치레와 뿌리까지 흔들던 태풍을 마른 자서전에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소멸을 위해 버티는 곳
아프지 않아도 아픔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풍장으로 사라질 날까지 끝내 그의 거처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1월호
신영애
전남 영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2011년 《심상》으로 등단.
崇烏感想文
굴참나무에 이입한 마음을 본다. 굴참에서 굽히다 굴屈, 굴 사람이 모이는 곳 굴窟, 땅을 파거나 뚫는 굴堀, 파다 파내다 굴掘과 간여할 참參, 참혹할 참慘, 벨 참斬, 우두커니 설 참站, 뉘우칠 참懺, 구덩이 참塹, 부끄러울 참慙, 참소할 참讒, 참람하거나 어긋날 참僭, 뉘우칠 참讖이다.
나무는 이미 죽은 것이므로 통나무다. 진물 흐르는 사연을 내뿜고 있으며 세풍을 견딘 흔적 옹이가 자리 잡고 있다. 산 마루, 산 그림자만 길다. 한때 살았던 생을 말한다. 기계음처럼 재생은 멈췄다. 잠시 스친 거 같은 꿈결만 있다. 그 사이만이라도 온기는 있었던 것일까! 산 불과 병치레까지 온몸 뒤튼 운기雲氣만 있었던 거다. 이렇게 스쳐 가는 이도 있으니까!
생은 그야말로 찰나다. 인식과 더불어 소멸의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하루가 아무런 의미를 담지도 못하고 저무는 광경을 볼 때 아침은 진정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구우일모九牛一毛라는 말이 언뜻 또 스친다.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 마음,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는 마음은 없어야겠다. 실패의 원인을 찾고 길을 찾아야겠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 했다.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나 파놓는다. 동물도 이러한데 아무런 대책 없이 산다는 건 무책임이다. 도전하는 마음도 패했을 때 최소한의 방어선은 준비하며 생각하는 마음은 있어야겠다. 굴정취수掘井取水라 했다. 우물을 파서 물을 얻는다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가 있다면 손톱이 해지더라도 땅을 파듯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하며 굴하지 않는 노력만이 물 마실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참하는 일 아끼는 신하를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 삭주굴근削株掘根, 내 못된 버릇이 있다면 그 뿌리까지 캐내어 화근을 없애야겠다. 원칙을 잘 지킨다면 수목참천樹木參天이겠다.
굴참에서 굴과 참에 마음을 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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