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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이야기/정끝별

에세이향기 2023. 12. 29. 02:46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 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 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밤새 이야기는 그렇게 쏟아지고 불려져

아침의 너는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시집 『모래는 뭐래』 2023. 5

    정끝별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모래는 뭐래』 등.

 

   鵲巢感想文

    두부는 시를 상징하는 또 다른 시어다. 두부가 생성되는 과정을 통해 시의 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적 묘사를 이룬다. 콩의 원산지는 만주와 한반도로 우리 고유의 음식 재료였다. 콩으로 만든 두부 또한 우리 선조들이 즐겨해 먹은 음식 중 하나다. 자루 속 누런 콩은 실수다. 실수는 실제 쓰이는 갖가지 소재로 보는 것도 괜찮다. 두부에 안치한 콩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한 두부를 생각한다면 한 개인을 생각한다면 물론 일정한 수지만 소재는 다양하다. 과거를 지나온 현시점 충격적인 일들과 지울 수 없는 일은 한 개인도 역사를 이룬다. 먹은 그 시점에 대한 사건, 기록이라면 두부는 콩이 아니라 걸러지고 단단한 플롯과 다름없다. 이것이 만인의 밥상처럼 설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명예도 갖겠다. 굳이 명예까지 얻지 않아도 쓰는 일은 두부의 순수를 더 지켜내는 일이라서 마음은 한결 가볍다.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생각하면 하루의 지심을 뽑고 거기서 나온 콩 서리에 논두렁을 지나 한밤 달빛 아래서 화톳불 피워놓고 구워 먹는 기분까지 든다. 입술 새카맣게 구슬리며 콩깍지 까던 시절이 있었다. 삶은 별 것 없다. 살아 있으면 콩은 뿌려지고 생산되며 거두는 일까지 즐거워한다면 그 삶은 참으로 복되다 하겠다. 무명 보자기에다가 콩 한 옴큼 쥐어짜며 그 콩물 마시는 일도 나쁘지는 않으니 그 한 잔에 내 마음마저 얹어 하루를 씻으니 만만한 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참으로 한밤 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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