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1 / 양현근
마당에 감꽃을 내려놓고
안산 너머 보리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내며 건너가면
서쪽 하늘이 홍시처럼 익어갔다
엎질러진 계절을 주머니에 주워 담던 손끝에
해마다 감물이 들었다
붉은 기억의 저편
골목길을 지키는 감나무에 풋감처럼 매달린 기억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젓던 아이
그날의 풋내 나는 미소를 깔고 앉아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을 생각했다
유년의 뒤란에 다닥다닥 매달린 떫은 시간들
해거름
배고픈 송아지 울음이 감꽃에 앉았다가 후두둑 쏟아진다
묵은 감나무 그늘이 출렁거린다
-양현근 시집 「기다림 근처」
기억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맛이다. 덜 익은 감을 씹었을 때 입안에 달라붙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타닌 성분처럼 혀끝을 다시 한 번 굴려보게 하는 것이다. 그 맛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물처럼 우리를 물들여 오래도록 되새김질하게 한다. 시 속의 화자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행복한 아이였다. 높이 올라가면 푸른 하늘에 닿을 거라고 긴 장대를 휘저었다. 감꽃을 주워 만든 감꽃 화관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빛깔의 그 어린 날들은 어른이 되어 현실이 녹록지 않을 때 떠오른다. 절망과 한숨 섞인 날들에 하늘 한번 올려다보는 것조차 잊고 살 때 더욱 다가온다. 그런 각박한 생활 속에서 다시 한 번 찾게 되는 붉은 기억의 저편들, 비록 홍시처럼 물러 떨어진 꿈일지라도 그 추억은 우리를 견인해주는 보이지 않은 힘이다. /서정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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