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박일만 시인의 『부뚜막 - 육십령 25』 마땅히 닦아내야 할 무엇도 없는데 닦고 계신다 어른들 말이 법인 줄 알고 사시던 꽃다운 시절부터 큰 상은 시부모와 남편, 작은 상은 시동생들 어머니의 밥상은 따로 두지 않았다 몸 쪼그리고 앉아 먹던 울음밥 부엌과 방 사이를 닳도록 드나들면서 짱짱했던 허리도 활처럼 휘었다 여든이 넘어서도 고향 집을 지키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생시에 심어놓은 나무만 꼿꼿하다 솥단지 같은 시절을 가족에게 다 퍼주고도 푸성귀 많은 밥상조차 호사스럽다고 눈물로 쓸고 닦고 지켜 오신 시골집 부엌 훌쩍 자란 나무가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아득히 온기 사라진 부뚜막 대처에 사는 자식들 기다리시는 어머니 밥상에는 태반이 그리움이다. 박일만 시집 『살어리랏다』 -달아실출판사 -중에서 - 부뚜막, 참 정..

좋은 시 2023.12.11

배추를 묶으며/박일만

배추를 묶으며 -육십령 44 박일만 가을이 밭 모서리에 쪼그려 앉아 조각 볕을 쬐는 날 널브러진 팔을 가지런히 묶어준다 맨 바깥 잎은 엄마, 아빠의 팔 안쪽 몇 잎은 언니, 오빠의 팔 그 안쪽은 셋째, 넷째의 팔 식구들이 팔을 들어 겹겹이 감싸주자 막내가 포대기에 싸인 듯 중심에서 웃는다 따뜻한 표정, 막내는 이제 속이 꽉 차도록 자랄 것이다 찬바람 막아주고, 서릿발 대신 맞고 방패막이가 된 넓적한 팔들 양팔을 서로 겯고 체온을 모으는 혈족들 한 울타리 속에서 온 가족이 밥 먹고 사는 중이다 찬 기운 스며드는 땅속에 기둥 박고 팔이란 팔 죄다 벌리고 있던 배추 한 포기 가슴께를 단정히 매주자 신공법으로 지은 잘 생긴 집 같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 나 홀로 밥 먹고 나 홀로 술 마시고..

좋은 시 2023.12.11

적막이 오는 순서

적막이 오는 순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16〉 적막이 오는 순서 조승래(1959∼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조승래(1959∼ ) 여름은 격렬하다. 그것은 타는 듯한 열기와 소란스러운 매미 소리와 장맛비 같은 것으로 온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여름은 부담스럽다. 사는 일 자체도 경쟁으로 달아오르는데 거기에 여름의 열기까지 보태자니, 청춘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쳐 갈 무렵 여름의 격렬함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그 사라진 빈자리로 가을은 온다. 그러니까 가을은 지우..

좋은 시 2023.12.01

낙엽송/신달자

낙 엽 송 신 달 자 (1943∼)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동아일보/나민애의 詩가 깃든 삶』2023.11.25. - 수능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 애 재수한다’고 말하는 친구를 만났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그녀의 남은 힘은 그녀의 몫이 아니다. 그건 모두 ‘우리 애’에게 가 있을 것이다. 왜 모르겠는가. 아이도 힘들겠지만 엄마는 아이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부모는 참 이상한 존재다.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루 종일 자식 생각은 할 수 있다. 내 목구멍으로는 아무거나 넘겨도 상관없는..

좋은 시 2023.11.28

문숙 시 모음

나는 문숙 가나의 어느 부족에선 사람이 죽으면 관 모양이 생전의 직업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어부였던 사람은 배나 물고기 모양 구두장이였던 사람은 구두 모양의 관에 담긴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는 시집이나 펜 모양의 관을 그려보지만 아니다 시로써 돈을 벌어보지도 못했으니 시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삼십 년을 주부로 살았으니 밥솥이나 냄비 모양을 생각해보지만 아니다 전업주부라 하기엔 시와 통정한 시간이 너무 길다 국적 없는 집시처럼 바람에 이끌리며 산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내 전부를 던져본 적 없어 작가로서도 주부로서도 이념도 없고 신념도 없다 이 시대의 작가라면 이름이 올랐을 블랙리스트에도 나는 운 좋게 빠져있는 시인이다 오늘을 살며 진보도 못되고 보수도 못되는 나는 붉은 깃발이나 태극기 모양은 더..

좋은 시 2023.11.28

홍시/문숙

홍 시 문 숙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 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긴 시간 네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네 모든 감각을 딛고 먹먹해져야 하는 일이네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네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 - 시집〈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

좋은 시 2023.11.28

서효인의 「로맨스」 감상 / 나민애

서효인의 「로맨스」 감상 / 나민애 로맨스 서효인(1981~)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

좋은 시 2023.11.28

바닥 / 김기택

바닥 / 김기택 제대로 한 방 맞았다 바닥이 휘두른 펀치가 어찌나 세던지 눈두덩이 이 센티미터나 찢어지고 피가 터졌다 점점 높아지는 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내 몸을 받쳐 주던 의자가 발에 밟히는 게 불편했던지 제 몸을 살짝 뒤틀었는데 순간 중심을 잃은 다리는 의자에서 껑충 뛰어올랐고 머리는 의자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바닥이 솟구쳐 올라 왼쪽 눈과 뺨을 세차게 갈겼던 것이다 늘 발밑에만 있어서 바닥이었는데 늘 보아도 보이지 않아서 바닥이었는데 몸통이 고꾸라지는 바로 그 순간 바닥은 머리 위에 있었다 큰 절을 받듯 높은 곳에 앉아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바닥에 접속되는 순간 별들이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수많은 별이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바닥에 그토록 많은 별이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얼굴이 피를..

좋은 시 2023.11.28

이덕규의 「업어주는 사람」 감상 / 나민애

이덕규의 「업어주는 사람」 감상 / 나민애 업어주는 사람 이덕규(1961~ )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선뜻 업히지 않기에 동전 한 닢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업히는 사람의 입이 함박만해졌다고 한다 찰방찰방 사내의 벗은 발도 즐겁게 물속의 흐린 길을 더듬었다고 한다 등짝은 구들장 같고 종아리는 교각 같았다고 한다 짐을 건네주고 고구마 몇 알 옥수수 몇 개를 받아든 적도 있다고 한다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 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

좋은 시 2023.11.28

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을 끓이다/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 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 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 다 ​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

좋은 시 2023.11.15

활어/황사라

활어/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

좋은 시 2023.11.15

국수/박경순

국수 ‘국수’ 하고 말하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사발 밥보다 많이 먹던 시절 아! 아버지 국수를 덜어주려면 그릇과 그릇을 붙여야 한다 그대에 나눠주듯 어깨를 바싹 붙여야 한다 내 어린 시절 한 끼 식사로 허기진 가슴 넉넉히 채워 주었던 국수 한 그룻 그리고 아 버 지 9월, 후포 밤바다에서 가을을 만나다 가을은 소리로 다가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그리움을 울컥 울컥 토해내는 후포바다는 여전히 여름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소나무 숲과 길을 잃은 검은 개 한 마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갈매기와 노을을 잊은 후포바다는 등기산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너머 고기를 잡으러 간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아버지는 대게 몇 마리 가슴에 품고 오실는지 녹등, 홍등 등대는 걱정스레 반짝..

좋은 시 2023.11.12

땀/정경해

땀 외 1편 정경해 손톱 세운 겨울바람 목을 휘감는 한신빌라 골목길 폐지 줍는 노인 등에 안개 자욱하다 저 굽은 능선에 그려지는 생의 지도枝道 밭은기침에 움푹움푹 길이 파이고 박스가 쌓일 때마다 새길이 자란다 무수한 시간을 누덕누덕 기운 오래된 등에 내일을 여는 하루가 다시 박인다 땀 줄기 깊어진 어깨에 가래처럼 달라붙은 납작한 삶이 모락모락 고개를 들고 질긴 숨줄, 한 땀 한 땀 하루를 깁는다 슬리퍼 욕실 슬리퍼 한 짝 화장실 문 닫을 때마다 빼꼼히 고개 내밀다가 번번이 한 소리 듣는다 목이 끼어 숨도 못 쉬면서 기어코 발꿈치를 붙든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냐고 윽박지르면 풀 죽어 구석에 엎드려 있다 깜깜한 화장실에 갇혀 오죽 바깥세상 그리웠을까 가벼운 몸을 들어 바로 눕히니 흠뻑 젖은 얼굴로 미안하다..

좋은 시 2023.11.12

멍에 / 이건청

멍에 / 이건청 개펄을 끌고 밀면서 왕십리쯤을, 대학 캠퍼스 인문관 쪽 가파른 계단을 오르곤 하였다 검은 염색 군복을 입은 그가 옆구리에 낀 책이 '국어학사'였던가, '현대시론'이었나, 아직 찬바람 속을 명주나비가 날아들곤 하였다. 4월이었던가, 목월 선생의 목련꽃도, 꽃 그늘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리곤 하였다 강의실 난간 쪽에서 바라보면 썰물의 바다, 끌고 밀며 가야할 개펄이 멈춰 있곤 하였다. 숨가쁜 개펄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힘든 개펄을 버리려고, 산등성이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개펄이 그냥 멍에로만 있는 게 아니라 까아맣게 널려진 딱정게들이 드나들며 꿈꾸는 집이며, 백합조개들이 뻘 속에서 진주를 키우는 우주라는 것을 평생을, 깊이 빠지는 개펄을 끌고 밀..

좋은 시 2023.11.12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좋은 시 2023.11.12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나는 자주 위험했다/김성희 #골목 늦은 밤 골목은 세계의 끝으로 가는 미지다 곡선의 완곡어법으로 사라짐의 결말을 서술하는 문장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모퉁이에서 그만 눈빛을 잃은 후 얼굴이 무심한 사람과 동행했던 그때 나는 몹시 위험했다 #불면 짙은 어둠은 청춘의 외연을 감싸고 있었지 들키고 싶은 나를 포장하느라 달의 껍질을 벗겨냈던 불면 별들이 감꽃같이 반짝이던 봄밤이었고 캄캄한 슬픔에서 칸 칸 피어났던 허기진 문장들로 막무가내 시인을 열망했던 그때 나는 끝도 없이 위험했다 #비 우산 속에서 발끝만 보고 걷는 버릇이 있지 발끝에 날름거리는 물의 혀를 좇는 내 눈동자는 어두워 선과 악이 섞여 흐르는 물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지 불편한 이름들이 물에 번식하는 축축한 공간 그때 서랍 속에 있어야 할..

좋은 시 2023.11.11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납작한 바다 / 정상미 바다는 가볍게 구워져 입안에서 부서져요 도토리묵 위에서 흩어지기도 하죠 한때 갯바위가 되고 싶었던 나는 파도의 음률을 사랑했어요 돌에 뿌리내리고 자란 가느다란 몸을 선호했지요 촘촘하게 펼쳐 놓은 하루를 말려 수평선을 당겨오면 시간의 껍질처럼 포개진 초록 잎사귀들 곡선밖에 모르는 춤으로 출렁이다가 온몸으로 바다를 받아적어요 듬성듬성한 연초록 사이 따개비 놀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소리를 버리고 슬픔이란 슬픔 죄다 흡입해서 갯내를 뿌려요 매운 연애의 비렁길을 돌아 심해에 묻어둔 스물세 살의 무거운 말들이 달려 나와요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기억들 , 얇은 바다를 깔고 밥과 감정을 넣어 돌돌 말아요 당신도 결국엔 납작해졌고 지금은 습기를 버린 얇은 이별의 바다 한 장 길고 ..

좋은 시 2023.11.11

가족 / 이길옥

가족 / 이길옥 아랫목에 앉아 발을 뻗으면 한 뼘 자투리가 남는 윗목까지의 거리 그 비좁은 오두막에도 봄볕이 기웃거립니다. 한 번도 떳떳하게 허리 펴보지 못하고 한 번도 자신 있게 앞서보지 못하신 아버지 고된 피곤을 어머니 치마폭에 털어놓고 목에 걸리는 한숨으로 방안을 채웁니다. 방을 채운 한숨이 봄볕에 버무려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자식들은 불평을 깔고 앉아 곱고 탐스런 꽃으로 벌 나비를 불러 모읍니다. 더 작다고 샘내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더 적다고 강짜 놓거나 기죽지 않습니다. 살 비비고 숨결 합치면서 기대어 삽니다. 아버지의 지친 몸을 받쳐주고 어머니의 아린 속에서 아픔을 건져냅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이엉을 이고 힘 겨워하는 토담집 낡은 문턱을 봄볕이 걸터앉아 방안의 칙칙한 어둠을 ..

좋은 시 2023.11.10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바닥을 친다는 것에 대하여 / 주용일 (1964~2015) ​ 모든 수직이 수평으로 눕는 바닥은 세상에 널려 있지만 진정으로 바닥을 칠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닥을 슬픔으로 칠 때 통곡은 통곡다워지고 웃음은 뛸 듯한 기쁨이 되기도 한다 길바닥이나 지하도 바닥 같은 생의 밑바닥 깔고 앉아 뭉그적거려 본 뒤에야 바닥을 치는 일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바닥 치고 일어서면 거기서부터 다시 길인 것도 알게 된다 물에 빠져 익사직전 캄캄한 숨막힘의 순간, 발바닥에 닿는 강바닥의 촉감에는 바닥을 친다는 것이 바닥을 찬다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솟구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버려지거나 버림 받은 것들이 마지막으로 이르는 곳이 바닥이지만 바닥이 없다면 호수는 하늘을 담지 못하고 우물은 목마른 이의 갈증 풀어..

좋은 시 2023.11.08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말발굽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치며 걸을 때마다 창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던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 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좋은 시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