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고등어를 굽다가/김수열

고등어를 굽다가 김수열 등 푸른 고등어 한 손 사다 절반은 구이용으로 패싸고 나머지는 조림용으로 토막 내고 불판에 올려 고등어를 굽는다 적당히 달구어 뒤집어야 유연한 몸매 그대로 살아 푸른 물결 찰랑이는데 대책 없는 서툰바치 뒤집을 때마다 몸통 갈라지고 머리통 떨어져나간다 능지처참이다 사람 만나는 일 더도 덜도 말고 생선 굽듯 하라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 망가뜨리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 무너뜨리면서 남은 길 가야 하는가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좋은 시 2023.07.23

골목을 수배합니다/최정신

골목을 수배합니다 ​ 최정신 ​처음 걸음마를 떼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르쳐 준 골목이었어요 밥 짓는 냄새가 그윽한 굴뚝이 구름을 복사하고 모퉁이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내려다보던 전봇대가 온갖 바깥소식을 전하고 찹쌀떡, 메밀묵이 야경을 돌고 채송화, 분꽃, 과꽃, 코스모스가 계절을 데려다 주었어요 고무줄놀이로 근육을 키웠고 땅따먹기로 보폭을 키우기도 했어요 담 밑에 기대 서러움도 달랬고 첫사랑을 빙자해 입술도 훔쳐 갔어요 처마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된장찌개 냄새를 날리며 이마를 맞댄 창가에 구절양장 낭만이 깜박이던 백열등 따스한 불빛은 어디쯤 있을까요 주차금지 팻말에 서정을 빼앗긴 골목 어느 날 굴착기란 괴물이 들이닥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부수고 박살을 냈어요 골목에서 은혜를 입은 아이들이 자본주의 ..

좋은 시 2023.07.20

로맨스/서효인

로맨스/서효인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서효인(1981∼ ) 시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 시를 보여..

좋은 시 2023.07.18

늙은 호박 / 박철영

늙은 호박 / 박철영 세상사를 말할 때는 겉만 보고 말하지 마라 홀로 꽃 피다 지고 맺힌 늙은 호박덩이 일지라도 긴 여름을 허투루 살지 않았네 삼복 지나 처서 넘은 입동까지도 지칠 줄 몰랐을 저 불 같은 성정 초겨울 서릿발 돋친 논두렁에서 넝쿨까지 마른 너를 거둬 두 동강을 낸 뒤에야 여름날 사라진 뜨거운 해가 네 안에 빼곡한 걸 알았네

좋은 시 2023.07.16

바닥/이대흠

바닥 이 대 흠 (1967~ )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태어난 그곳 여자들은 널을 타고 바닥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구강포 너른 뻘밭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간 바닥은 몇 평쯤일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 몸이 갈 바닥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 마을 바닥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좋은 시 2023.07.16

찬밥/ 문정희

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좋은 시 2023.07.14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좋은 시 2023.07.11

금광 저수지/김평엽

금광 저수지/김평엽 여기에 천만 근 무거운 소리들 가라앉아 있구나 사람과 사람들에 버림받은 소리들 종적을 감추더니 이곳에 와 거대한 슬픔 이루고 있었구나 세상에 제대로 된 슬픔 이루고 있었구나 세상에 제대로 된 슬픔 하나 머물지 않던 이유 알겠다, 내 언제 굵은 슬픔 만나보았으랴만 작달막한 슬픔들만 남아 수다스런 세상, 그 얄팍한 세상에 빠져나와 이곳에 이룩한 거대한 슬픔을 만나노라 세상의 파릇한 슬픔이 평화를 누리는 곳 이곳이 슬픔의 천국, 신성한 소도임을 수면을 날으는 가마우지조차 지그시 눈 감고 만취의 비행 즐기지 않느냐 하늘에 깔린 꽃보다 더 반짝이는 저 수천 수만 애태울 것 없이 그저 맑은 물빛으로 맑은 것끼리 은빛 피라미 쑥쑥 낳는 저 세례 받지 않은 것들이 내 머리에 손을 얹나니 지혈되지 않..

좋은 시 2023.07.09

격포에서/김정희

격포에서 1. 횟집을 떠다밀며 미끄러진 길이 파마머리 파랗게 물들이는 바다로 추락한다. 그 머리를 끌어 덮다 밀쳐내는 채석강에는 시간이 층층으로 쌓여 있다. 몇 길 높이로 쌓아놓은 헌책(古書) 같은 바위 틈새에서 옛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바다는 흐느끼다 낄낄거린다. 그 소리가 바다 위에 물거품으로 하얗게 깔린다. 바닷가 모래알들은 그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글자들이다. 바람은 그들을 짜 맞추느라고 부산하게 뛰어 다닌다. 하루 두 번씩 생각난 듯 다시 와서 그 책장에 숨겨 놓았던 지난 날들을 들추던 바닷물이 뒤를 돌아보도 않고 주춤주춤 수평선에게 끌려 간다. 넘어 가는 해는 황금빛 긴 꼬리로 바다 바닥을 번쩍번쩍 쓸고 있다. 2. 바닷바람이 유채밭에서 노랗게 뒹굴 때 영산홍은 가지마다 횃불을 꺼내들고 열렬히..

좋은 시 2023.07.09

두부를 말하다/피귀자

두부를 말하다 피귀자  순종적인 나는 뼈가 없어 칼도 두렵지 않죠 상처를 잊는 법을 알고 있어 어떤 비명도 지르지 않죠 자존심의 각에 따라 모서리가 생겨나도심장만큼은 물컹하죠 바깥에서 바라본 중심은 아득하지만굳이 나를 고집하려 하지 않아서들러리와 어울려 맛을 내죠 바스러진 꽃 스미고 뭉쳐 몽글몽글해진 하얀 살갗비로소 당신 살과 피가 되고 싶죠 뜨겁게 쥐어 짜인 기억마저 노래하는 칼날에 잘려지죠 토막처지는 내 삶의 어설픈 구간은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린 당신의 방식이죠

좋은 시 2023.07.08

그 여자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박제영

그 여자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 박제영 ​ 태안에서 당진을 잇는 한적한 지방도를 지나던 승용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려서는 갓길 좌판에서 수박을 팔고 있는 할머니와 흥정을 시작했는데, 할머니 이 수박 얼마예요 올해 날이 궂어서유 아니 이 수박 얼마냐고요 긍께 품이 많이 들어서유 그러니까 얼마 드리면 되냐고요 대충 줘유 서울 사람이 잘 알겄쥬 촌것이 알간디유 만 원 드리면 될까요 냅둬유 소나 갖다 멕이게 서울서도 만 원이면 살 수 있는데요 그럼 서울서 사지 여까지 왜 왔슈 그러지 마시고 좀 깎아주면 안 돼요 서울깍쟁이 서울깍쟁이 하더만 진짜구만유 그럼 이만 원에 세 개는 어때요 싸게라도 많이 파는 게 좋잖아요 냅둬유 썩어지면 거름이나 주지유 머 그 여자, 결국 수박을 샀을까 못 샀을까 내 엿 내..

좋은 시 2023.07.07

최광임 시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최 광 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

좋은 시 2023.07.01

겨울강 / 정철웅

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

좋은 시 2023.06.30

가을 왕조/김영미

가을 왕조 ​ ​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왕조 일가가 단풍놀이에 나섰다 ​ 산중턱 위 구부정한 해님이 읍揖하며 산과 들에 살과 즙 산채로 대령이요 큰 소리로 고告한다 ​ 사방을 둘러보신 대비마마 열 두 왕손을 무릎에 앉힌 듯 너럭바위 미소를 지으신다 수청을 들라-앗! 대전마마 단풍을 호령하시고 질투에 몸이 달은 후궁 조 씨 숙의 안 씨 귀인 정 씨 몸종 삼월이 구월이 시월이 오색당의를 불태우며 산을 오른다 ​ 아는지 모르는지 구중궁궐 중전 한 씨 서책을 덮고 후원을 거니신다 낙엽 지는 소리에 돌아보신다 ​ 대전 뒤뜰에는 팔월 그믐 하룻밤 성은이 몸져눕고 빈 가지마다 목매단 무수리들 우수수 떨어지고 ​ ​ ​ ​ 밀양 표충사를 거쳐 천황산에 오를 때이다. 쉬어가느라 8부 능선 너럭바위에 앉아 지금껏 힘들게 오..

좋은 시 2023.06.29

트럭/하린

트럭 하린 트럭, 하고 공기를 토하면 거대한 밤이 질주해 온다 살다 보면 폭력적인 기계를 몰고 고속도로를 점령하고 싶은 밤은, 꼭 온다 너는 비행소년에서 비행청년으로 자라고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엔진으로 장착한다 방향지시등이 고장 난 삶에서 넌 애인에게 예민한 급소를 들킨다 건기 내내 굶주린 사자처럼 넌 너무 오래된 이빨을 숨겼다 천천히 혈관을 따라 불법 제조한 분노가 주입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혁명이 끓어오른다 식상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시야를 흐린다 애야, 넌 너무 착하단다 이제 그만 일하러 가야지 어머니가 걸어갈 때마다 등 뒤에선 사리事理가 뚝뚝 떨어진다 B급 기름 같은 아버지와 길들여지지 않는 애인과 마이너스 통장을 보고도 그런 악몽을 견디다니 어머니는 트럭보다 무서운 기계다 아, 씹어 먹고 ..

좋은 시 2023.06.28

수면/권혁웅

수면 권혁웅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시집『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5) ▶권혁웅=1967년 충북 청주 출생. 1997년 문예중앙신인상 시 당선.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등이 있다. 현대시 작품상, 현대시인협회상,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수면'은 물의 얼굴(水面)과 잠(睡眠)으로 읽힌다. 시인은 작은 돌을 던져 물의 깊이(水深)와 사람의 근심(愁心)을 짐작하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옛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水面은 돌팔매질 한 번에 주름치마처럼 구겨졌다, ..

좋은 시 2023.06.22

사랑니/이경숙

사랑니 이경숙 겉으로 솟지 않는 이름까지 알 수 있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보이는 입안 저쪽 무언가 캄캄한 뿌리를 건드리고 다닌다 판독기에 X-ray 환하게 내걸린다 간단히 흑백으로 드러나는 뿌리 끝 무엇을 잡으려는지 암팡지게 휘어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들쑤신 게 너였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밑둥치 아득한 데서 외침이 솟구친다 뺨에 멍들이고 두두룩히 부어오른다 여러 날 애먹인 후 빠져 나간 사랑니 그렇다. 안타까울수록 놓는 순간이 아픈 것

좋은 시 2023.06.07

몽돌/박숙이

몽돌 박숙이 까무잡잡한 것이 억수로 시달린 것이 땡글땡글 반들반들 매력적인 것이 참 각도 없이 맹랑한 것이! 몸 굴리는 소리도 저리 야성적인 것이! - 시집『활짝』, 시안, 2011 몽돌의 나이는 크기로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작은 몸으로 나서 점점 커지고 다시 작아지는 것처럼 돌도 처음에는 작은 알갱이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달라붙어 덩치가 커지고 다시 풍파에 시달려 부서지고 깎인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모난 데를 덜어내고 매끈해지기를 거듭한다. 이후로도 까마득한 시간을 구르며 작아질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새벽 바다에서 차르르 들려오는 소리, 파도소리인지 돌 구르는 소리인지 바람인지 세 가지 맛이 섞인 듯하다. 눈으로 보는 순간 소리가 왜곡된다고 믿는 나는 혼자 깨어난 바닷가 여관에서 ..

좋은 시 2023.06.01

고드름의 뼈/조선의

고드름의 뼈 조선의(1960~ ) 빙하기를 표류한 빛살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빤히 나를 바라보는 길쭉한 물방울 병정들의 연대가 깜냥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드름이 향한 곳은 아찔한 처마 끝이거나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하는 땅바닥 이렇다 할 옹이도 없이 아래로 오르는 정점 설원에 닿지 못해 사라진 입김들이 난반사되듯 구름의 역린에 달라붙는다 흔한 곁가지 하나 내지 않고 거꾸로 매달려 생을 몰두하는 무골의 종족 제 살을 훑어 뾰족한 마음의 가시마저 녹여내는 안간힘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눈꽃 한 송이 필 수 없는 사막 어디쯤 저 몸뚱이 툭 부러뜨려 뚝딱 집 한 채 지으면 생의 단면들이 입자로 부서져 내 척박한 체념까지 한꺼번에 쓸어가 버릴까 한순간도 감출 수 없는 투명한 기척 결기를 세웠던 뼈들이 물로 녹아든..

좋은 시 2023.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