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혹한의 중심을 딛고 나는 건너가리니
고단한 삶의 누추를 단단히 얼리어 벽을 세우고
혹한의 맑음을 재단하여 창을 달아내면
그대의 이마에 징표처럼 돋아나는 분홍빛이여
내 삶의 남루들이 제각기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밤 깊은 겨울강의 단단한 얼음장 위,
한 무리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항해 /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곰팡이 / 이병일
가마솥에 콩을 넣고 장작불을 지핀다
익은 콩을 절구통에 찧는다
메주는 서늘한 그늘에서 말린다
1
바람 좋은 날에는 가장자리부터 가벼워진다
미세한 햇살조각이 굴절되어 박혀드는 순간에
창을 열듯이 제 가슴을 활짝 열어 벽이 갈리고 있다
거친 난간 위에 포자들은 습한 계곡의 길을 건너고 있을까
밝음과 어둠 속, 빛을 굽는 보름달 아래
숱하게 구멍들이 뚫렸다
담쟁이 넝쿨처럼 곰팡이가 내 몸을 뒤집어썼다
멈출 수 없는 발,
푸른 숨소리 내는 바람 따라 계곡 사이
곰팡이 벌레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2
햇살이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속 뜰 가운데
항아리를 묻는다 첫눈을 맑게 틔운 물에
메주, 참숯, 잣, 대추, 고추를 재운다
그 위에 하얀 천을 금실로 싸매고 뚜껑을 덮는다
밤새 애태우다가 헹궈내며 숙성되기 시작한
구수하게 트여오는 숨소리가 밤하늘로 터져버린다
잠에서 깬 새들이 푸른빛을 물어 나르는 아침,
옹글게 견딘 내 몸은 깊은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일까
어둠에도 눈이 부시는 간기가 흐른다
바가지 닿는 소리가 날 때,
나는 기나긴 여정 속 밥상에 올라와 앉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