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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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최광임 시

에세이향기 2023. 7. 1. 11:52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최 광 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제목이 없다
오다가다 만난 것들끼리는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다행이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피고 꽃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마흔아홉을 지나며



최 광 임



나 이제부터 당신에 대한 호칭을 바꾸려네
시기 질투 빠진 여자를 성님이라 부르고
식물성 남자를 오라버니라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네

생이란 황량한 벌판을 가로 지르다
온 듯 간 듯 스치며 저무는 게 한살이라면, 혹
간밤의 서늘한 기온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삶이 어디 그런가, 가다 보면
햇살과 바람과 소낙비 같이 천지간 유일해서
피붙이 같은 이름 지어 부르고 싶기도 하는 것인데

참 많은 초록이 지쳐가고 뒷굽 닳듯 몸 헐거워진
추수절이 되어서야, 여자를 벗어버린 성님 몇과
남자보다 더 귀한 오라버니 몇
소출로 삼으면 넉넉하다 싶어지는 것이네

더는 채워지지 않을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서
성님 풀피리 불고 오라버니 상두 돌리며
또 한 생애 건너자는 것이네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최 광 임



부끄러워 몰래 갔다
이슥한 어둠 탓도 있었지만 바다는 묵묵했다
활어보다 싱싱했던 한때 지나, 까막까막
몇 채 안 되는 외등 켜고
폐경기 맞은 여인처럼 주름져 있었다

속살 여리디여린 곳 갈라 물을 들이고
굴삭기,덤프트럭에 만신창이 된 제 상처 핥으며
자꾸자꾸 어둠을 끌어다 덮는 바다다
부려놓은 인연, 몸 깊숙이 근 박아둔 채
풋것 주렁주렁 달고
목놓아 먹일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 되어
백주 대낮이 부끄러운 나다

가끔 진저리치듯 진눈깨비 몰아가고
바다와 나,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짠물에 종기 우려내면 그제서야 낮이 아프지 않을라나
아버지 닮은 누군가 지금도 술을 어둠처럼 마시며
이 거리 저 거리 상한 비늘로 날릴 것인데
바닷가 윗뜸, 이제 술기운 가신 채 누워 계실 아버지
맑은 무덤에도 진눈깨비는 내릴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무덤가 아버지 축축이 젖은 손 뻗어
내 시린 눈 어루어주고 있었다
멀리서 희끄무레하게 흰 파도 밀리다 말다,
바다와 나
붉게
몸 들이고 있었다



늦은 사랑 - 창평에서 한철



최 광 임



창평 장날 면에 나간다,
두부 한 모 막걸리 한 병 사고
약방 지나 미장원 옆 쌀집에 들러
아저씨, 쌀 3kg만 주세요
봉지쌀을 팔아 거처로 돌아오는 저녁,
근래 봉지쌀을 팔어가는 사람들이 많네라
쌀집 아저씨 말에 쿵 내려앉는 가슴
첩첩산 골짜기 어디쯤 빈집에 살림 차리고 싶은
내 맘 콕 찔린 것도 같아
짐짓 경기 탓이라는 듯
피식 웃어넘기고 돌아 나오는 길
이 마을 어딘가에 나보다 먼저 살림 차린
늦은 사랑이 있을지도 몰라
부러움이 앞서왔던 것인데
지난 번 장에 나와 붉은 냄비를 사고
가난한 사랑 끓여줄 휴대용 가스버너를 사고
라면 몇 봉지와 인스턴트 반찬 몇 가지와
이 집에 들러 봉지쌀을 팔아갔을지 몰라
날이 풀리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뙈기밭이라도 얻어 경작할 농작물을 궁리하고
가끔은 면소재지 국밥집에 들러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암뽕순대를 시켜
백아산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온 밤이 있었을 거야
그들의 사랑은 누룩처럼 발효되고
빈가에 고소한 냄새 진동했을 거야
마을의 개들 밤새 짖어댔을 거야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산이 먼저 문 닫아 걸고 길을 내어주지 않는 산골
내 사랑도 그 산기슭 어디쯤에 자물쇠를 채우고
누룩 띄워 막걸리를 담고
붉은 냄비에 밥물이 넘칠 때
냄비 닮은 엉덩이의 여자가 되어도 좋을
꿈꾸는 한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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