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격포에서/김정희

에세이향기 2023. 7. 9. 10:06

   격포에서



  1.
  횟집을 떠다밀며 미끄러진 길이 파마머리 파랗게 물들이는 바다로 추락한다.  그 머리를 끌어 덮다 밀쳐내는 채석강에는 시간이 층층으로 쌓여 있다. 몇 길 높이로 쌓아놓은 헌책(古書) 같은 바위 틈새에서 옛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바다는 흐느끼다 낄낄거린다. 그 소리가 바다 위에 물거품으로 하얗게 깔린다. 바닷가 모래알들은 그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글자들이다. 바람은 그들을 짜 맞추느라고 부산하게 뛰어 다닌다. 하루 두 번씩 생각난 듯 다시 와서 그 책장에 숨겨 놓았던 지난 날들을 들추던 바닷물이 뒤를 돌아보도 않고 주춤주춤 수평선에게 끌려 간다. 넘어 가는 해는 황금빛 긴 꼬리로 바다 바닥을 번쩍번쩍 쓸고 있다.


  2.
  바닷바람이 유채밭에서 노랗게 뒹굴 때 영산홍은 가지마다 횃불을 꺼내들고 열렬히 봄을 환영한다. 그 둔덕 아래 검게 쪼그라진 할머니 하나 갈색 고무다라에 바다를 가두어 놓고 나를 부른다. 그 둥근 바다 속에 무르익은 봄 하늘이 빠져 있고 삶은 고동과 소라가 그 하늘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비릿한 냄새가 튀어나와 지나가는 내 발길을 끌어당긴다. 꼬리를 자르고 귀를 세게 빨아야 따라나오는 고동의 한 평생, 구불구불 동굴에 숨겼던 발자국들, 우리도 오늘을 잘라버려야 지난 날이 줄줄이 따라나오고 그 빈 속을 내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젊은 여자가 고동을 쪼옥 빨며 천연색 스냅사진처럼 서 있다. 담배를 입에 문 사내는 고동처럼 두 다리를 비비꼬고 있다.



- <현대시>,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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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자연의 원형성과 현재성


        박남희


  자연은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우리가 복잡한 도시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도 자연은 우리의 몸 속을 들락거리는 공기로, 혹은 도시 속의 나무로 존재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뿐더러, 막상 떠날 수도 없다. 그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자연은 늘 현재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현재적 자연은 그 동안 인간에 의해서 무수히 변형되고 훼손되어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때때로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을 동경한다. 하지만 훼손되기 이전의 원형적 자연인 에덴동산은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형적 자연과 만나기 위해서는 신화에 의탁하여 원시적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환상적 상상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원형적 자연과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리 앞에는 자연의 원형성과 현재성이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인간에게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다.
  김정희의 「격포에서」는 자연의 원형성과 현재성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과 문명의 비극적 존재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의 앞머리에 숫자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 <1.>과 <2.>는 어느 정도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시 <1.>은 현재적 자연 속에서 원형적 자연 또는 역사적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적 자연 속으로 돌아오는 시간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첫 행의 “횟집을 떠다밀며 미끄러진 길이 파마머리 파랗게 물들이는 바다로 추락한다.”는 진술은 시적 화자가 ‘횟집’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문명적 시간을 떠나 바위의 형태로 층층으로 쌓여있는 채석강의 과거적 시간 속으로 여행 하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시인은, 층층으로 겹쳐져 있는 채석강 바위틈으로 파도치며 밀려드는 바다의 모습을 “높이로 쌓아놓은 헌책(古書)”을 읽으면서 흐느끼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하는 바다로,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알들을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글자들로 각각 비유하고 있다. 이런 비유는 보르헤스가 「모래의 책」이나 「바벨의 도서관」에서 우주와 자연을 도서관이나 책으로 비유하거나, 책을 모래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이 시에서 시인이 채석강이라는 공간에 자신의 관념을 투사시키지 않고 바다가 바위 책을 읽고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보르헤스가 「모래의 책」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모래의 책’을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에 비견된다. 그리고 이 시에서 “그 책장에 숨겨 놓았던 지난날들을 들추던 바닷물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주춤주춤 수평선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모래의 책」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넘겨도 마지막 페이지를 찾을 수 없고 한번 펼쳐진 페이지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떨다가 책을 다시 서가에 끼워 넣고 도망쳐 버리는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물론 이러한 상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책과 연결시키고 있는 상상력은 동일하게 읽힌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닷물을 끌고 가는 수평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그 다음 행의 ‘넘어가는 해’와 연결시켜 보면,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시간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시 <1.>은 이렇듯 자연의 움직이는 모습을 통해서 과거의 시간을 탐색하고 있는 시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시는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시에서 바다가 읽고 있는 책도 인간의 책이라고 볼 수 없다. 시인은 다만 자연의 움직임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시인이 자연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연 속에서 인간을 읽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화해서 바라봄으로써 자연을 인간과 소통 가능한 존재로 만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시인은 시 <1.>에서 자연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 <2.>에 오면 자연은 돌연 과거보다는 현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현재적 자연은 어쩔 수 없이 문명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시 <2.>에서 바다는 더 이상 자연 속의 바다가 아니라 고동과 소라를 파는 할머니의 고무다라 속에 갇혀 있는 바다이다. 시인은 고동과 소라가 들어있는 고무다라 속에 비친 하늘을 “둥근 바다 속에 무르익은 봄 하늘이 빠져있고 삶은 고동과 소라가 그 하늘에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광경은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준다. 하늘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동과 소라는 삶은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자세히 보면 반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죽어있는 것들을 반어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문명에 의해서 훼손되어진 자연의 아픔을 우리에게 강조해서 보여준다. 여기서의 고동이나 소라는 자연의 제유로서 문명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고동의 꼬리를 잘라 “구불구불 동굴에 숨겨졌던 발자국들”, 즉 “고동의 한 평생”을 빨아먹는다. 그런데 “구불구불 동굴에 숨겨졌던 발자국들”은 흡사 시 <1.>에서의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의 모습을 연상시켜준다. 이러한 사유는 그 다음 행에서 재차 확인된다. 시인은 “오늘을 잘라버려야 지난 날이 줄줄이 따라나오고 그 빈 속을 내일로 가득 채울 수”있을지를 반문함으로써, 자연을 훼손시키는 문명에 대한 시인의 부정의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자연의 모습은 시 <2.>가 아니고 <1.>에 들어있다. 시 <1.>의 자연 역시 흐느끼기도 하고 낄낄거린다는 점에서 인간의 정서와 닮아있지만, 시 <2.>에서처럼 갇혀있거나 훼손된 자연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 <1.>은 <2.>와 병치를 이루면서 문명의 후경(後景)이 되어 문명에 의해서 훼손된 시 <2.>의 자연을 전경화시켜 강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의 “젊은 여자가 고동을 쪼옥 빨며 천연색 스냅사진처럼 서있”는 모습이나 “담배를 입에 문 사내”가 “고동처럼 두 다리를 비비꼬고”있는 모습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와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젊은 여자가 고동을 빨아먹는 것이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라면 사내가 고동으로 비유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자연파괴가 결국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시 <2.>의 후반부에서 젊은 여자와 담배를 입에 문 사내를 연인관계로 본다면 에로스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여자가 남자로 비유되고 있는 고동을 빨아먹는 다는 점에서 타나토스와 연결되어 있다. 에로스로 표상되는 인간관계마저 결국 타나토스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이 시의 후반부는 비극적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본질적으로 생태학적 상상력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이 시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성(에로스)과, 인간에 의한 자연의 훼손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타나토스)가 공존하는 문명적 시간 속에서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적 삶의 상태, 즉 에코스적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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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평론,「탈주와 회귀욕망의 두 거점-장정일론」등 다수, 고려대, 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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