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식당 의자 - 문인수

식당 의자 - 문인수 ​ ​ 장맛비 속에, 수성 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 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

좋은 시 2024.02.11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 박지웅 ​ ​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가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하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있는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가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어 어깨너머라는 말은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

좋은 시 2024.02.11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 ​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 ​ ​ ​ 울음은 몸이 끓인 불이에요. 울음이 내는 소리를 울음이 담긴 몸이 들어요.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몸이 끓인 불을 식히느라 울음은 또 계속 나오지요. ​ 슬픔은 무엇인가요? 안쪽으로부터의 통증. 먼 곳에서부터 스며든 습기. 젖고 난 뒤 시들 때까지 습기를 놓치지..

좋은 시 2024.02.11

오십세 - 전건호

오십세 - 전건호 ​ ​ 금방 들은 것도 오십초면 증발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왼손이 오른 손을 믿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일 년 전 감추어둔 쌈짓돈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비상한 은닉술에 동네참새들은 닭대가리라는 둥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는 둥 쪼아댄다 닭이든 까마귀든 허공을 나는 새 아닌가 나를 둘러싼 시공이 가벼워진다 내게 착지했던 생각들 깃털이 돋아났는지 고개 돌리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잘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겁게 짓누르던 잡념이 휘발되는 것 텅 빈 풍선이 되어 미풍에도 풀풀 눈짓만 줘도 포르르 바람만 불어도 기우뚱 한다 기억의 한계가 0을 향해 달릴수록 무념의 경지에 달하는 듯싶다 붙잡으려 했던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간다 0을 향해 초읽기 진행되는 동안 금방 뱉..

좋은 시 2024.02.11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꽃게 먹는 저녁 - 김화순 ​ ​ 펄떡이는 꽃게 몇 마리 산다 꽃게는 톱밥을 밀어내며 안간힘으로 버틴다 사방으로 날리는 절체절명 유보된 죽음이 시간을 조금씩 자르고 있다 집게발이 허공을 잘라내고 시선을 잘라내고 저녁 6시를 잘라내자 시침과 분침이 기우뚱, 중심을 잃는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피를 흘린다 집게발이 햇살의 마지막 온기를 싹둑, 자른다 잘린 하루치의 바다가 한사코 냄비 속으로 풀어진다 부글부글 비어져 나오는 게거품 집게발의 사투가 차려낸 저녁 식탁은 달그락 달그락 꽃내음 비릿하다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다준 에너지라며 나는 게눈 감춘 듯 먹어치운 죽음으로 하루를 연장한다 죽음이 나를 새롭게 편집한다 ​ ​ ​ ​ ​ 시인은 “꽃게 몇 마리”를 사다가 그것이 죽어 냄비 속에 들어가 음식이..

좋은 시 2024.02.11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 ​ 돌능금나무 둥치 세 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 고여 있어, 그 목소리는 바다에 내리는 눈, 얼음집 내벽 녹았다 다시 얼어붙은 물방울, 너는 잠시 빛나고, 나는 적막을 품고, 허기의 기록들이 마침내 느슨하게 흐르고, 달빛의 윤곽 너머 안개 낀 밤의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 우리는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 서로의 지형도를 숨긴 채,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곳 없고, 게릴라성 호우와 수치심에 대해, 먼 훗날 빙하에 갇힌 채 얼어버린 심장을 뚫고, 내 사랑의 저격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 ​ ​ ​ ​ - 문혜진 시집 《혜성의 냄새》, 2017 ​ ​ ​ ​ ​ 〈몰이꾼과 ..

좋은 시 2024.02.10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 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에 ​ 죽은 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 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 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 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 떼를 품고 싶어 해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빌처럼 ​ ​ ​ ​ ​ 『문학사상』2013년 11월호 ​ ​ ​ ​ ​ 기억..

좋은 시 2024.02.10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 최서림 ​ ​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삶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제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

좋은 시 2024.02.10

토막말 - 정양

토막말 - 정양 ​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 ​ ​ 시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 비평사,1997) ​ ​ ​ ​ 시를 참하게 보일 요량으로 부러 시어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좋은 시 2024.02.10

독수리 시간 - 김이듬

독수리 시간 - 김이듬 ​ ​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

좋은 시 2024.02.10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 ​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

좋은 시 2024.02.10

껌 - 김기택

껌 - 김기택 ​ ​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것 뭉개..

좋은 시 2024.02.10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서랍의 형식 김행숙(1970~ )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 똑같지 않았다 다시 차례차례 열었다 다시 차례차례 닫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 .........................................................................................................................................................................................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이 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언제 무엇을 넣었는지 ..

좋은 시 2024.02.09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 ​ 절름발이 여자가 벙어리 사내에게 눈빛으로 손가락으로 말들을 꿰매고 있다 아파트 모서리에 놓인 초원 구두 수선집 ​ 사내는 구두를 받자 닳은 뒷굽을 떼어낸다 초원 끝에서 들려오는 말갈족의 말굽소리 사내는 구름 속에 들어가 지평선을 깁고 있다 ​ 벙어리의 저린 가슴을 헤집고 나온 말의 뿌리 한 번도 사랑한단 말, 못 해주고 살아온 사내의 착한 눈망울은 디딜 곳 없는 허공이다 ​ 못처럼 박혀드는 널 남겨두곤 죽을 수 없다 마른 입술 축이는 사내의 눈이 들어가는 구두의 닳아진 내부는 저녁처럼 어두워진다 ​ 한 평 반의 수선점은 낡고도 비좁은데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하늘에 사내는 성긴 별들을 총총히 박아 놓는다 ​ ​ ​ ​ ​ ​ 시집 『쌍봉낙타의 꿈』(고요아침,..

좋은 시 2024.02.09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 ​ 아직 발굽도 여물지 않은 어린것들이 소란스레 함석지붕에서 놀다가 마당까지 내려와 잘박잘박 논다 징도 박을 수 없는 무른 발들이 물거품을 만들었다가 톡톡 터트리다 히히히힝 웃다가 아주까리 이파리에 매달려 또록또록 눈알을 굴리며 논다 마당 그득 동그라미 그리며 논다 놀다가 빼꼼히 지붕을 타고 내려가 방바닥에 받쳐둔 양동이 속으로도 들어가 논다 비스듬히 기운 집 안 신발도 신지 않은 무른 발들이 찰방찰방 뛰며 논다 기우뚱 집 한채 파문에 일렁일렁 논다 ​ ​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Hildegard Wohlgemuth)의 동화 제목

좋은 시 2024.02.09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늘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좋은 시 2024.02.09

맨발/문태준

맨발- 문태준 ​ ​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

좋은 시 2024.02.09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 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기에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속은 서릿몸 신경 줄까지 드러낸 헝큰 마음 언 땅에 비켜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좋은 시 2024.02.08

무릎의 문양 - 김경주

무릎의 문양 - 김경주 ​ ​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

좋은 시 2024.02.04

허연, 면벽

허연, 면벽 ​ ​ ​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들의 주변부에서 내가 산다. ​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 가 아니다. ​ 누구는 세상 한가운데 산정(​山頂)에서 살고 누구는 세 상 한 귀퉁이에서 산다. 하여튼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건 두 렵고 신기한 일이다. 근데 그게 가끔 말썽이다. 난 또 한 사 람을 잃었다. 이젠 기까지 약해져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침마다 섞어 버린 이름들이며 술병들이며 뭐 그런 것들 이 남는다. ​ 지리멸렬해졌다. 말없이 바퀴나 굴리는 낙오자다 나는.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좋은 시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