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 김기택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것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출처 《껌》(2009) 첫 발표 《문예중앙》(2006. 1)
아무렇지도 않게 씹다 버리게 되는 껌. 그 껌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 껌을 보면서 '마음의 눈'을 뜨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인들이다. 시인은 씹다 버린 껌에서 연대기를 읽어낸다.
이빨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껌의 연대기를 읽는 것이다. 껌은 이빨 자국이 찍힌 화석이다. 씹다 버린 껌에는 나의 기록이 남아 있다.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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