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에세이향기 2024. 2. 9. 12:52
김행숙의「서랍의 형식」감상 / 김기택


서랍의 형식

   김행숙(1970~ )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열었다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닫았다
똑같지 않았다
다시 차례차례 열었다
다시 차례차례 닫았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끌어모은 검은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누군가, 누군가 또 사라지는 속도로

.........................................................................................................................................................................................

   잘 사용하지 않는 서랍이 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언제 무엇을 넣었는지 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엉망진창이고 뒤죽박죽인 게 당연하다. 찾으려 하면 쓸데없는 건 잘 보이고 중요한 건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다가 필요 없어지면 슬쩍 나오는 물건들이 그 속에 가득하다. 서랍 속의 엉망진창과 뒤죽박죽과 어둠의 깊이는 밖으로 나오고 싶을 것이다. 밝고 무한하고 끝없이 사방이 열려 있는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의 서랍 바깥까지. 서랍 바깥에 노출되어 있으면 이름과 규칙과 의무와 책임은 깊이 숨어들고 싶을 것이다, 어질러지고 뒤엉킨 채 시간을 모르는 서랍 속의 서랍 속의 서랍 속까지.

인간과 삶과 서랍의 형식은 서로 닮은 것 같다. 마음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야 인간적이고, 사랑은 변덕스러워야 더 안달이 나고, 감정은 날뛰거나 붉으락푸르락해야 제맛이다. 손이나 팔처럼 코나 입처럼 나는 내 소유인 줄 알았는데, 그 속은 까도 까도 알 수 없고,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이다. 아무리 열어도 다 열리지 않고 아무리 닫아도 다 숨겨지지 않으니, 인간은 천사 같다가도 원수가 되고, 일상은 늘 애태우고 가슴 졸이고 정신없다.

  김기택 (시인)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 임동윤  (1) 2024.02.10
껌 - 김기택  (1) 2024.02.10
구두의 내부 - 동행 / 박성민  (1) 2024.02.09
빗방울은 구두를 신었을까 - 송진권  (1) 2024.02.09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0)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