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시간 - 김이듬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그녀의 방까지
나는 바짝 마른 독수리 등에 업혀갔다
독수리는 ‘최고의 맹수’가 된 순간 그것을 포기한다. 혹독한 자기 파괴를 거쳐 자기 재탄생을 기다린다는데 무섭고 숭고하다. 이런 부정적 숭고를 거쳐야 맑은 자아가 새로 서리라.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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