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 비평사,1997)
시를 참하게 보일 요량으로 부러 시어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다. 말랑말랑한 낱말로 조합된 시라고 해서 정서가 고양되는 것은 잘대 아니다. 그 시어가 시에 어떻게 스며들고 시의 맥락에 얼마나 충실히 기능하느냐가 관건이다. 시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뱅뱅 겉도는 미사여구 보다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시펄"이란 막말 한 토막이 ‘손등에 얼음조각’을 올려놓은 것처럼 더 저릿하다.
성층권에서나 내려다봐야 읽힐 정도로 대문짝만하게 쓰진 모래 위 글씨는 외계인과의 내통을 위한 나스카 유적의 기호처럼 은밀하다. ‘정순’이란 여인은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동선을 잃어버린 옛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왜 철지난 바다에 홀로인지, 모래 위에 대문짝만한 육두문자를 비뚤비뚤 썼는지, 누가 읽어줄 것인지 불가사의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속살이 순수한 남자의 이미지를 가진 황정민이 나오는 어느 영화 속 장면이 생각난다.
‘사랑해!’라는 교양인의 평범하고 상식적인 표준어를 버리고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내동댕이친 이 막무가내 식의 사랑은 ‘정순’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 게 없고 세상의 모든 금기도 뛰어넘을 태세다. 그래서일까,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무지막지한 순정인가. 하지만 되레 무식한 건 저만치서 번득이면서 달려오는 밀물이다. 정순이가 못 읽으면 하늘이 읽고 하늘의 구름이 읽고 지나가면 바다가 와서 한 입 삼켰다가 토해낸다.
이윽고 큰 파도에 밀려온 밀물이 단숨에 삼켜버리는 “정순아보고자퍼죽겄다씨펄”이란 토막말에 눈물이 핑 돈다. 바다의 가슴도 가을이 다가도록 저리고 아렸겠다. 끝없이 배회하다가 저녁놀 속으로 진저리치며 사라진 저 아름다운 막말이라니. 투박한 한 사내에게서 아픈 마음을 쏟아내게 하고 떠난 ‘정순’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에서 외롭고 쓸쓸한 사내의 마음을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 저녁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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