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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에세이향기 2024. 2. 10. 07:50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 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에

죽은 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 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 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 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 떼를 품고 싶어 해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빌처럼

『문학사상』2013년 11월호

기억이 비단 사람만의 전유 능력은 아니지만, 사람만큼 기억으로 사는 존재가 또 있을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잉태되는 순간부터 이전의 기억들을 수없이 다듬고 더듬고 정리하거나 더러는 방치한 채 의식의 저편에 끊임없이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생인 것이다. 어떤 기억은 망각의 태그를 달아 아주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어떤 기억은 꺼내기 쉽게 손닿는 곳에 말끔하게 정리해두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너무 추하고 괴로워서 제멋대로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아놓기도 한다. 어떤 기억은 너무 소중해서 수없이 쓰다듬다 낡아버리고 어떤 기억은 너무 슬퍼서 눈물에 얼룩져 점차 희미해지기도 한다. 오히려 깊숙하게 묻어둔 뼈아픈 기억은 손이 타지 않아서 오랜 세월 함구해서 어떤 기억보다 생생하게 보존되어 어느 날 불쑥 고스란히 살아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한다. 이처럼 저마다의 기억은 설령 모두가 완벽히 재생되거나 인출되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각인되어 보관되어 있게 마련이다. 컴퓨터 데이터가 아닌 이상, 기억은 아무리 삭제해도 훼손되거나 온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어떤 기억들끼리 병합되고, 그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가장 좋은 영역을 놓고 자리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기억은 기억을 밀어내거나 기억은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면서, 생의 순간순간 아름답게 넌출거리며 흔들린다.

위의 작품에서처럼 기억은 미움이나 증오, 배신과 불신보다는 특히 “사랑의 역사”와 “정든 추억”을 담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기억은 사람과 분리될 수 없는 사람 자신이며, 사랑과도 분리될 수 없는 사랑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픈 기억도 결국은 사랑이 그 근원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기억, 사랑의 기억을 무엇보다 가슴에 품고 싶어 한다. “3년이 지나도”, “33년이 지나도”, 삼백 년, 삼천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그 뼈아픈 이별을 잊을 수 없다. 세월호만 해도 이제 그만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황망하게 떠나보낸 이들에게 ‘지겨울 만한’ ‘충분한’ 시간의 경과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하지만 때때로 시간은 웅덩이처럼 고이거나 멈춘다. 2014년 4월 16일은 정지된 채 영원히 멈춰버린 시간이다. 이 시간을 잠시라도 망각하는 사람은 제3자이거나 가해자다. 화해할 수 없는 결코 수용될 수 없는 이별은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상처에 상처만 덧입히고 각인시킬 뿐, 그 생채기는 아무는 법이 없다.

대리 보충되지 않는 상실의 기억은 과거라는 기억에 자리 잡지 못하고 지금 여기의 현재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현될 뿐이다. 과거를 떠안은 기억은 차라리 행복한 지점을 점유한다. 그래서 시인은 기억을 따뜻하고 둥근 어항이 되고 싶은 그 무엇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어항이 자궁 속 양수처럼 적당량의 물을 머금거나 품고 그 안에 아름다운 기억들을 물고기처럼 풀어 놓을 때, 그들을 그 안에서 살랑거리며 헤엄치게 할 때 비로소 어항은 그 의미와 기능을 완성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물고기와 어항과 물의 미동은 요람 위의 “모빌처럼” 천천히 함께 흔들리고, “정든 기억을 품”은 기억의 “은어 떼”는 더욱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어항은 사랑을 기르고 사랑을 자라게 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간직하고 보유하고 싶은 공간의 은유이다. 기억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스쳐가는 무의미한 시간들을 거부하면서 기억은 어항처럼 사랑을 담고 싶어 하는 시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기억은 그것이 고통이든 행복이든 가장 빛나는 순간을 오롯이 껴안고 잔잔하게 찰랑일 때, 비로소 단 하나의 사랑을 일깨워주는 의미 있는 단 하나의 어항이 되어 그것들을 가두기보다는 품고 견디게 하고 보호하고 건강하게 키워낼 것이다. 이토록 잔인한 생에서 펄펄 끓는 냄비가 아니라서 달궈진 팬이 아니라서, 더군다나 품이 넓고 깊은 따스한 어항이라서 다행인 삶은 차라리 윤리적이고 이타적이다. 게다가 소중한 기억들을 보듬고자 하는 시인의 어항은 나아가 타자를 환대하고 안아주는 포용의 시학을 넘어 저 지구 반대편의 가난한 이웃들에게까지 그 시선이 닿아 있다.

신현림 시인론 「절망이 아름다운, 마법의 시학」부분.

《시로 여는 세상》2017년 여름호

김효은 / 1979년 목포 출생. 시인. 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현재 서강대, 경희대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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