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이꾼과 저격수 - 문혜진
돌능금나무 둥치 세 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 고여 있어,
그 목소리는 바다에 내리는 눈, 얼음집 내벽 녹았다 다시 얼어붙은 물방울,
너는 잠시 빛나고, 나는 적막을 품고, 허기의 기록들이 마침내 느슨하게 흐르고,
달빛의 윤곽 너머 안개 낀 밤의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우리는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
서로의 지형도를 숨긴 채,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곳 없고, 게릴라성 호우와 수치심에 대해, 먼 훗날 빙하에 갇힌 채
얼어버린 심장을 뚫고, 내 사랑의 저격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 문혜진 시집 《혜성의 냄새》, 2017
〈몰이꾼과 저격수〉는 사랑의 시로 읽힌다. 문혜진의 시는 사랑의 한 속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사랑은 어느 시대나 가장 중대한 것에 속하고, 거의 ‘유일한’ 것의 영역에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사랑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원리로 받아들여지면서 대중이 소비하는 스토리텔링들, 즉 대중가요, 시와 소설들, 영화와 드라마들 속에서 사랑 숭배는 차고 넘친다. 20세기가 지나고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당신, 나 사랑해?”라는 물음과 “그럼! 사랑하고말고!” 하는 대답은 끊이지 않는다. 사랑은 신이 죽고 난 뒤 20세기에 창안된 새로운 종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는데, 그것은 사랑의 번성과 잉여 속에서 의미 매개로서의 사랑이 점점 더 고갈되고 있다는 점이다.
“돌능금나무 둥치에 세 들어 살고 싶다던 남자”를 사랑했던 적이 있던가. 그 남자는 지금 여기에 없다. 부재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사랑이라면 이 시의 화자는 그런 갈망으로써 남자의 목소리와 체취를 떠올린다. 우리 안의 본성, 그중에서 성욕의 이상화를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페로몬이라는 호르몬 혹은 그것을 머금은 목소리와 체취는 사랑을 찾기 위해 발산하는 동물적 신호들이다.
문혜진은 사랑의 본성을 통찰하면서, 이것을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의 관계로 치환해냄으로써 그 독창성을 발휘한다. 사랑을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로 바꿀 때 뜻밖에도 사랑은 그것이 숨기고 있는 본질을 드러낸다. 사랑은 상대를 향유하고 취하는 것, 온전히 내 욕망과 의지 아래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의 초월성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자 나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연애에 빠진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키스나 애무는 사랑의 감정이 이것을 과도한 낭만성으로 포장하지만 그 실체적 진실은 상대의 경계를 해제하고 상대의 초월성을 붙잡으려는 전략이다.
사랑을 향한 ‘나’의 저격은 자주 표적을 빗나간다. 사랑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고 수시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적은 간 곳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시인은 그 사랑의 대상이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확인해주지 않는 까닭이다. ‘나’의 적막과 허기는 당신의 사라짐에서 비롯된 신체적이거나 정서적인 반응들이다. 사랑이 자아실현의 한 형태를 흉내내기 때문에 이런 반응들은 당연한 것이다.
당신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는 “아늑한 사라짐들, 반역들, 불분명한 용서들” 속에 있다. 이것들은 사랑은 이루어진 흔적이 아니라 깨지고 흩어진 실패가 남긴 잔재들이다. 돌이켜보면 쫓고 쫓기는 우리의 사랑은 늘 쉬운 법이 없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했듯 “사랑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침투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표적을 향해 달려들지만 대열은 흩어지고, 표적은 간 곳 없”었기 때문이다. 손에 쥐여지지 않는 표적! 그것이 당신이라는 존재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서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겨냥하는 자와 숨는 자”다. 사랑은 쉽지 않다. 사랑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광기와 혼란을 품고 있다. 더러는 사랑이 착란으로 변질되고, 그 착란은 폭력을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빗나간 사랑이라고 부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외롭게 만들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에서는 종종 피 냄새가 나고 피 맛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 속에서 통찰하는 문혜진의 시는 단박에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이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지옥의 가장 큰 특징은 미래의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지우면서 지옥의 성분들을 키운다는 점이다. 지옥은 미래를 집어삼킨 현재 속에서만 오로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와 굴라크, 그리고 난민 수용소가 오늘의 지옥이다. 오늘의 지옥을 견디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옥을 받아들여 그것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옥을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 지옥에서는 누구나 사냥꾼이 되거나 사냥감이 되어야 한다. 사냥꾼들은 숲을 헤집고 다니며 사냥감들을 포획한다. 그것이 사냥꾼들의 의무다. 근대 이전이 정원사의 시대였다면, 유토피아의 전망을 상실한 탈근대 이후는 사냥꾼의 시대다. 너도나도 혈안이 되어 사냥감을 찾아 숲속을 질주한다. 사냥꾼의 대열에서 낙오되는 순간 그 자신이 사냥감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난감한 일이지만 사냥꾼이 되거나, 혹은 사냥감이 되거나!
글 :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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