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세 - 전건호
금방 들은 것도 오십초면 증발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왼손이 오른 손을 믿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놓고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일 년 전 감추어둔 쌈짓돈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비상한 은닉술에
동네참새들은 닭대가리라는 둥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는 둥 쪼아댄다
닭이든 까마귀든 허공을 나는 새 아닌가
나를 둘러싼 시공이 가벼워진다
내게 착지했던 생각들 깃털이 돋아났는지
고개 돌리는 순간 날아가 버린다
잘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겁게 짓누르던 잡념이 휘발되는 것
텅 빈 풍선이 되어
미풍에도 풀풀
눈짓만 줘도 포르르
바람만 불어도 기우뚱 한다
기억의 한계가 0을 향해 달릴수록
무념의 경지에 달하는 듯싶다
붙잡으려 했던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간다
0을 향해
초읽기 진행되는 동안
금방 뱉은 말도 잊어버리는
어처구니 구관조가 된다
계간 《문학 선》 2010 여름호
애완으로 집에서 기르는 구관조가 남편의 부정을 폭로, 한 남자가 부인으로부터 이혼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를 오래전 접한 바 있다.
부인이 한 달간 친정에 머물다 귀가해 보니 구관조의 언행이 평소와 달랐다.
남편의 통화내용을 자주 엿들은 듯 ‘우리 마누라 뚱땡이 하마야’‘마누라하고 어떻게 자기를 비교해!’‘자기 조금만 참고 기다려’ 등등의 말을 흉내 내어 지껄이는 걸 발견하고 그동안 남편이 애인과 통화하며 숱하게 자신의 흉을 보며 작당한 것으로 단정하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부인의 이혼사유가 성립하려면 법정에서 구관조의 증언이 필수적인데 구관조를 증인으로 채택할지가 관건이겠으나 그 이후는 알지 못한다.
시에서처럼 ‘금방 뱉은 말도 잊어버리는 어처구니 구관조’라면 그 말을 리바이벌하여 부인께 일러바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증언대에 세운들 말짱 도루묵 아니겠느냐. 과연 구관조의 기억력은 막 50세에 접어든 남자의 건망증만큼이나 깜빡깜빡할까. 구관조는 말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앵무새보다 훨씬 뛰어나고 정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비결은 성대가 아니라 혀의 구조에 있으며 사람과 매우 흡사한 혓바닥을 갖고 있다.
구관조는 조류 중에서도 고등조류에 속하고 뛰어난 기억력이 학습능력을 증가시켜 시를 익혀 줄줄 암송하는 구관조도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구관조를 ‘새대가리’ 취급한다면 듣는 구관조로서는 서운하다.
‘무겁게 짓누르던 잡념이 휘발’되어 ‘기억의 한계가 0을 향해 달릴수록’‘무념의 경지에 달하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일상생활에서 건망증은 여러 가지 불편함을 초래한다.
특히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는 ‘내게 착지했던 생각들 깃털이 돋아났는지 고개 돌리는 순간 날아가 버릴’ 때는 마치 지갑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둥대기도 한다.
건망증이란 50대에 들면서부터 시작되는 연령적인 쇠퇴를 말한다.
건망증이 있다 해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통령 후보 TV토론을 지켜보면 기억력뿐만 아니라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후보도 보이고 표현력에서 아쉬움이 많은 후보도 있었다.
토론은 누가 기억력이 좋고 똑똑해 보이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사유가 더 합리적이며 그 깊이를 엿보고 가늠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럼에도 ‘초읽기 진행되는 동안 금방 뱉은 말도 잊어버리는’ 후보들에겐 연민이 느껴졌다.
-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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