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면벽
사람들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들의 주변부에서 내가
산다.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
가 아니다.
누구는 세상 한가운데 산정(山頂)에서 살고 누구는 세
상 한 귀퉁이에서 산다. 하여튼 뭘 해서 먹고 산다는 건 두
렵고 신기한 일이다. 근데 그게 가끔 말썽이다. 난 또 한 사
람을 잃었다. 이젠 기까지 약해져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침마다 섞어 버린 이름들이며 술병들이며 뭐 그런 것들
이 남는다.
지리멸렬해졌다. 말없이 바퀴나 굴리는 낙오자다 나는.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사는.
집착도 끊지 못하고 밥도 끊지 못하고
난 오늘 또 벽을 보고 잔다.
여기는 히말라야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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