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 신미균 (1996년 현대시 등단작)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깨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는 것이
퇴직한 왕의 신분에 어울린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담배꽁초를 주우러 다니는 연산군이 자리 때문에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저녁때까지는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경비아저씨가 나타나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늙어가는 저녁도 쉬이 찾아오지는 않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던 뼈마디들이
옥신각신하며 빠져나가려고 한다
진종일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허리까지 밖에 안 올라 온 탑 그림자를 말아 내리며
오늘도 의자왕은 한 무리의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백제 여인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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