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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에세이향기 2024. 1. 24. 16:19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 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않는다

달빛도 별빛도 발길 끊어버린 번화가 포구에 하늘길 바닷길 내어줄 그 바람, 아기 숨결 같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아니 온 듯

 

갤러리 같은 화장실

앉은 눈높이에 만난 안내문 하나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왔으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겠다

변기에 앉아

새삼 이 푸른 행성 생각에 골똘해진다

 

46억 년 전 푸른 빛을 뿜어

6천5백만 년 전 인류가 생겨 나와

먹고 입고 쓰고 버린 흔적 다 사라지고

그들은 아니 온 듯 다녀갔는데

 

겨우 300년 동안 지나온 우리의 흔적들은

켜켜이 썩지 않은 비닐층이 되어

새로운 이 지층을 인류세라 명명하려 한다니

 

이 땅에도 푸른 풀밭은 올 수 있을까

벌 나비 부르며 꽃들은 또 피고 질까

아이들은 발 벗고 뛰어놀 수 있을까

 

또 100년 뒤 누가

아니 온 듯 다녀가라는

이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이 행성에서 산뜻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인류세의 어떤 얼룩으로 남을지

일어나 내 흔적을 돌아본다

 

 

 

그냥 숲

 

 

한라산 끼고 한여름 땡볕을 지난다

 

숯쟁이나 사냥꾼들이 터놓았거나

오소리 족제비 노루들 다녔던 산 중턱을

허리띠 두르듯 이어놓은 숲길이다

 

너르면 너른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바람의 길 비틀어 주고받고

넘치면 넘치는 대로 덜하면 덜한 대로

한 올의 햇살도 넘치게 건네고

 

돌멩이가 이슬에게 이슬이 풀에게 풀이 나무에게

나무가 저 바람에게 바람이 다시 나에게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함께 있어 주기만 해도

알아서 다 일구어내는 숲의 일

 

이대로 이 숨이 저 숨에 이르게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본다

그냥 가만히 숲이 되어 선다

 

 

 

잠을 돌려주세요

 

 

나를 은행나무라 부르지요

살구나무와는 관계없이

뭐 은빛 살구 같다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지요

반쯤은 남의 이름으로 사는 서러움은 참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내 그늘에서 학문을 베풀었다고 하지요

천년 세월 용문사에서 풍월을 읊고 계시는 조상도 있고

당산나무로도 대접받는 뼈대 있는 가문이지요

그런 내가 이 도시 한복판에 불려 온 이유는

사계절 뼈있는 가문의 꿋꿋한 풍채이거나

도심의 공해를 용케 버텨내는 생명력 때문이거나

가을이면 저무는 것들의 배경으로

노란 융단을 깔아주는 서정 때문이겠지요

며칠 전에 산책길에 걸어놓은 공사 안내문을 보았어요

-외부 경관 개선을 통한 도시 관광 자원 확충-

내게 무슨 개선의 여지가 있을 리 없고

그렇다면 저 울타리 격인 쥐똥나무 얘기일 텐데요

아니나 다를까요

그러잖아도 네온사인 눈 부신 도로,

가로등도 즐비한 산책길 쥐똥나무 사이사이로

대낮처럼 환하게 조명등을 박아놓았네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런 스포트라이트는 바라지 않습니다

밤을 밤같이 낮을 낮같이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은행나무일 때까지 은행나무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늘의 영토

- 행촌리 당산나무

 

어르신의 무릎에

겁 없는 아이처럼 걸터앉았다

 

열 번도 넘게 육십갑자를 돌아 나오며

앉아 천 리 서서 만 리 내다보는

당당, 위풍당당

들판을 좌대 삼아 긴긴 세월에 내린 뿌리

어디, 몇 가구 둥지만 품었으랴

 

처음부터 이토록 촘촘한 그늘이었을 리가 있겠나

숨탄것 모두 저 높은 곳을 향해 내달리던 때도

거친 비바람 눈보라 맞짱 뜨며

가지 휠지라도 허리 꺾이지 않을 뿌리의 힘살로

일백 척 탄탄한 그늘의 영토를 넓혔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 지키겠다 작정했겠나

귀 솔깃한 입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품 안에 찾아드는 것들 품다 보니

여태, 이 자리를 지켰을 뿐

스스로 지켜야 할 것들 지켜왔을 뿐

 

이제 바람은 어느 쪽에서 불어와도 좋다

바람 따라 바람같이

새처럼 새와 함께

천년을 더 그늘 길 가실 무릎 앞에

가만, 엎드려 큰절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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