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가리라는 느낌에 맥이 확 풀리거나
나이 생각지 않고 친구들이 막무가내로 세상 뜰 때
책장에서 꺼낸 손바닥 따갑게 때리던 접이부채를 꺼내
이번에는 가슴을 되게 친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피붙이들 다 나오시라!
무엇이 건드려졌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외 4편 / 조영심 (2) | 2024.01.24 |
---|---|
보리 굴비 / 박찬희 (1) | 2024.01.24 |
장작을 패며/오세영 (0) | 2024.01.19 |
최문자 시 모음 (1) | 2024.01.17 |
문성해 시 모음 (0)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