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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때/황동규

에세이향기 2024. 1. 23. 10:10

삶의 본때/황동규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가리라는 느낌에 맥이 확 풀리거나

나이 생각지 않고 친구들이 막무가내로 세상 뜰 때

책장에서 꺼낸 손바닥 따갑게 때리던 접이부채를 꺼내

이번에는 가슴을 되게 친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피붙이들 다 나오시라!

무엇이 건드려졌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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