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막장 시

막장 / 김나영​ 폐광이 태백이나 정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리부도에는 삭제되어 있는 없는 게 없는, 서울특별시에도 폐광이 있다. 단돈 850원이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하는​ 이곳을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사람들과 뜨거운 밥 퍼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몇 년째 대안 없이 불거지고 가끔 아이의 두 눈을 치마폭으로 가린 풍경이 빠져나가고 나면​ 잠시 술렁거렸던 공기가 다시 흑연 가루처럼 가라앉는​ 이곳에 갱도(坑道)나 채탄(採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그들의 외투와 손과 신발이 검은 때로 반질반질하다. 햇빛도 그들의 몸에 닿자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차단된, 가느다란 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두 개의 막막한 구멍들과 나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영등포역 고가다리 아래, 서울역 주변이 아니더라도 기..

좋은 시 2024.06.06

격포

격포 / 고운기​격포라 찾아왔네 십년 만이든가來蘇寺 단풍 곱기도 했는데철없던 계집애들 여관집 밥 먹고차 한 잔 마신다고 몰려갔던 다방사람 드문 바닷가 거기 정담다방나이 든 여자 하나 하품만 하고 있었지십년 세월 깜박했네 어느새든가來蘇寺 단풍 아직 철 이른데어디였는지 정담다방 찾을 길 없고정답던 얘기만 허공 중에 떴겠구나콩국수 말아 먹는 여자 하나입에 든 것 삼키지도 않고“없어졌제라, 칠 년도 넘괐그만그 동안 한 번도 안 왔다요…….”서둘러 자리 뜨는 뒤통수만 가려웠다네.​- 고운기,『섬강 그늘』(고려원, 1995)​​​​격포 / 송유미​​미선나무 등걸에 기대어 속을 다 뒤집고 가는파랑주의보, 허리가 휜 뒷모습 바라본다.양철구름은 나뭇가지에 걸려 뒤뚱거린다.방파제 뒤웅박 안에 든 촛불은 시나브로 혼을 태운..

좋은 시 2024.06.06

복어​/ 박은영

복어​/ 박은영        독종 소리를 들었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죽지 않았다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려져도 꾹꾹 울음을 참고 몸뚱이를 굴러먹었다   왜 사니?   독한 말을 씹어 넘길 때면 헛배가 불렀다   슬픔을 가리는 위장술,   내성과 독성의 굴레에서 독한 년, 욕을 배불리 먹고 천하게 굴러다녔다   돌아서면 잊어버릴 만큼   나는 독기를 빼면 시체였다  투구꽃과 청산가리보다 한 수 위인 선대의 독 가哥들이 그랬듯   이를 악물고 살았다   살다 보니  그 많은 천적이 멸종되고 없었다

좋은 시 2024.05.27

문명 / 박일만

문명 / 박일만  아파트 창문 너머 하늘이 사라졌다공간을 채우며 빌딩이 점령했다콘크리트로 덮이고 구름은 더 높은 곳을 찾아 떠났다언뜻 보이던 햇빛도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저 높은 건물 속에서사람들은 공중 부양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틈새에 끼인 키 낮은 초등학교가 숨을 헐떡인다아이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콩나물처럼 자라 이 나라의 일꾼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어른들은 서슴없이 광장을 메꿨다메꿔진 하늘새 한 마리 날지 못하고 매미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마천루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지은 날개를 차려 입고가끔은 새처럼, 가끔은 매미처럼엘리베이터에 붙어 소리 지를 것이다인간의 세상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몸집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나타난 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치부되었을 뿐오고갈 길이 막힌 바람이벽에 부딪치며 세찬 소리로 ..

좋은 시 2024.05.26

바겐세일 / 박일만

바겐세일 / 박일만  서둘러 챙겨 입고 첫차에 오른다모닥불이 혓바닥을 날름대는 곳추레한 행색으로 빙 둘러 도열한다그 거리의 모퉁이드럼통을 달군 불이 얼굴을 익힌다큰 과일, 작은 과일, 건장한 과일풋과일, 익은 과일, 삭아가는 과일저마다 모양새를 조건삼아 진열된다최선을 다해 단내를 풍겨야 선택되는 생들봉고차가 다가와 손가락 호명하는 잠깐 사이동으로, 서으로, 남으로, 북으로일당 몇 만원! 중식제공! 줄 맞춰 저렴하게 몸 팔러 간다그들이 사라진 후 덩그러니 남은 잔챙이들서리 맞은 낙과처럼 추락을 맛본다그마저도 허기가 진다북새통이 지나가고 바람만 휘도는 거리 모퉁이선택받지 못한 생들은 또다시 쪽방으로 처박힐 것이다뒤늦게 도착한 생들 저희끼리 모여온기 사그라드는 드럼통을 껴안고두 손을 함께 구워 먹는다

좋은 시 2024.05.26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학이 비상하는 소리였을까달빛 머금은 검은 돌들이밤새 달빛을 토해내는 소리였을까숨 넘어가도록 차오르는 파도는물거품 부글거리는 생의 내륙까지막무가내 제 속내를 들이미는 중이다달빛을 베고 날아올는 학은몽글몽글 돌 부딪는 소리를 물어나르며멀고 먼 시간 속을 항해하는 지도 모른다태초 이래 두근거리며 열고 닫힌 해안선간밤에도 젖은 눈을 감았다 치켜뜨는지무수한 물방울이 튕겨오르고밤이면 수천 개의 별들이멀리 은하까지 해안선의 표정을 타전한다흑진주 몽돌은 수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흔적이다깊어진 연륜을 다독이며젖은 날개를 터는 학 한 마리마침내 눈부신 비상을 시작한다.​​​​ 멸치들의 반가사유상 / 이서​​여기는 외포항, 작고 비린 것들이 밝고 명랑하다살아서는 줄줄이 달고, 죽어서는 외려 고..

좋은 시 2024.05.25

부표의 승천 / 문성해

부표의 승천 / 문성해  줄이 끊긴 스티로폼 부표들이 하얗게 떠밀려 왔다.아이들은 이 뒤웅박 팔자를 공처럼 발로 찼다멀리 가지도 못하고 자잘한 스티로폼 알갱이들이산란하듯 모래밭 위를 슬렸다 무리짓듯몇 개의 흰 부표들이소박맞고 돌아온 동네 누이들처럼 늘어났다. 태풍이 유난스럽던 늦여름 철이었다 배고프고심심한 아이들은 바다의 박을 타듯때 절은 부표들을 손으로 갈라냈다.박속처럼 새하얗기만 부표들, 먹을 수 없는궁기의 나날들이 철지난 바닷가에 모여졌다떠도는 환멸처럼 모지라진 뒤웅박들 모여서한때는 바다를 등질 담벼락을 쌓을 수 있을까 굴러온, 떠밀려온 바다의 수박처럼 든든했으나더없이 가벼운 몸들은 그대로 잘게 부서지는 일뿐녹지 않는 눈송이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바다를 떠나자, 잘디잔 알갱으로 저질러만 졌으니가벼운 ..

좋은 시 2024.05.25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해도에도 없는 바다의 언덕들이 뜬금없이 일어서는여름에도 해 떨어지면 손 시려 조막손 되는사할린 섬 북동쪽 오호츠크 해가 북양명태의 안방이다.무식이 때로는 유식을 제압하고주먹이 법을 다스릴 때도 있어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바람이 다스리는 무법의 세상,천식 앓는 700마력 심장이 터질 듯 벌떡거린다어부의 삶이란 어차피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전속 항진, 월경越境의 깃발을 꽂는다만선의 바다의 정복자만이 누리는 영광이다

좋은 시 2024.05.25

나비물 / 유종인

나비물 / 유종인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 수도가 박힌 마당은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콸콸콸 물의 박수를 쳐준다꾸지람을 듣고 온 날에도 그늘이 없는 박수소리에손을 담그고 저녁별을 바라는 일은 늡늡했다그런 천연의 박수가 담긴 대얏물에 아버지가 세수를 하면살비듬이 뜬 그 물에 할머니가 발을 닦으셨다발등의 저승꽃에도 물을 줘야지그런 발 닦은 물조차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한 번 박수를 부은 물의 기운을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눈치 보는 바랭이풀 잡초까지 물너울을 씌워주고도박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쯤을 남긴세숫대야 물을 내게 들려 손님을 맞듯 대문을 여신다뿌리거라, 길이 팍팍해서야 되겠냐흙꽃*에게도 물을 줘야지최대한 물의 보자기를 펼치듯 헹가래를 치는 물마지막 박수는 이렇게 들뜬 흙먼지를 넓게 가라앉히는 일,수도꼭지가..

좋은 시 2024.05.25

물집 / 김미향

물집 / 김미향​​전못 하나 박지 않고 주먹장이음 공법으로만 지은물결과 윤슬로 빚은 물의 집,물의 골재를 채굴하려면 수심 몇 길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까​물은 목제나 철제보다 강해 녹슬거나 부러질 리가 없어집을 짓는데 긴요히 쓰이는 건축기법이다​설계도를 펼치면다양한 물의 부재들이 빼곡하게 설계되어 있다물의 집 한 채 짓기 위해물의 사유는 얼마나 깎이고 버려지고 다듬어져야 했을까​이글루 공법으로 쌓아 올린 물방울 집은 입구가 없다빛이 관통하는 모든 곳이 출구라 물의 집은 사방이 문,물집의 건축술에는 사유의 조감도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삼보일배의 고통, 장고의 시간, 노독의 궤적까지​수위가 깊은 문장은 물집의 집대성인가퉁퉁 부르튼 발은 건축의 바탕, 속여*였다가 잠길여**였다가몸의 가장 바깥 궤도를 공전하고..

좋은 시 2024.05.25

실비집 / 윤계순

실비집 / 윤계순​​어떤 말끝에실비집이라는 말이 튀어나와인터넷 검색을 하니, 그곳에 아버지가참 난처하게 앉아 내리는 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실비, 곤궁한 주머니 사정을 곤궁한값으로 쳐서 받겠다는 뜻 같은데나는 왜 실비집을 가늘게 내리는그 실비로 생각했을까실비, 노천의 막일에 이처럼 어정쩡한 판단이 또 있을까일을 하자니 자재資材들이 젖고말자니 한 겹 주머니가 젖을 터그 두 가지 사정엔 미루어지는 공기工期와공치는 일당이 있다허름한 일진日辰이 축축해져,실비 오는 듯 집을 나섰는데덕지덕지 바른 신문지 벽에 등을 기댄양철 지붕 처마 끝, 흘러내리는 빗소리에서둘러 천막 덮어놓고홑겹 사정들도 꾹꾹 덮어놓고이 핑계 저 핑계가 아니라모처럼 한 핑계로 둘러앉는 실비집,실비는 계속 내리고 노래들은 점점 삐뚤어지고찌그러진 양..

좋은 시 2024.05.25

사랑의 물리학/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뉴턴의 사과처럼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심장이하늘에서 땅까지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좋은 시 2024.05.08

나이테/최재영

나이테/최재영잘려진 나무를 읽는다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선명한 경계사이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나이테는 나무의 생장을 알 수 있는 척도다. 잘려진 단면을 보면 나무의 성장과정이 보이고 잘려진 나무에서도 새 ..

좋은 시 2024.05.03

부지깽이/조경숙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닭들을 내쫓기도 하고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몽당연필처럼 닳아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토사구팽兎死拘烹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좋은 시 2024.05.03

억새/박은양

억새​​​박은영​​​​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억세게 운이 좋은 날은 앞날을 내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의 흔들림은 비루해서 체머리를 앓는 독거노인의 고독을 닮았다​인생은 혼자인 것이니, 라며 애써 자위를 할수록 모든 날은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이었다​울음에도 곡조가 있다​그 음계를 따라 새가 둥지를 짓고 울 줄 아는 것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밤이면 나는 불면에 시달렸다 선대가 그랬듯이 젓가락을 쥔 손은 떨리고 혀끝은 둔해져 발음이 허투루 새어 나갔다​늙어 가고 있구나​마른기침을 하면 어린 새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위무하는 날갯짓 아래에서 나는 갈대라는 착각을 하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비루한 떨림으로 마디를 세우고 가슴이 벌어지듯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나는 억새,억세게 ..

좋은 시 2024.05.03

수선집 근처/전다형

수선집 근처​​​​전다형​​​​​​구서1동 산 18번지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의수족 아저씨가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땅으..

좋은 시 2024.05.03

겨울, 눈사람/신미나

겨울, 눈사람​​​신미나​​​​​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천천히 녹고 있었네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좋은 시 2024.05.03

항아리/최재영​

항아리/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나는 햇살을 움켜쥐고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아주 오랫동안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럴때마다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내게 저장된 세월을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좋은 시 2024.05.03

옹기 / 최재영

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이제야 알게 되었어요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

좋은 시 2024.05.03

대포항 근황 / 고창환

대포항 근황 / 고창환 ​​ 청봉보다 높은 파도가 허리를 편다 발이 묶인 목선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설악은 가을비에 맨몸으로 잠겨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정박중인 갈매기들이 저녁 하늘에 부리를 꽂고 끼룩끼룩 부푼 모험담을 풀어놓는데 횟집 좌판에서 비린 바람이 뼈째 썰린다 여기 퍼질러 앉아 쥐치나 씹으며 막소주 한 사발에 취해볼거나 할말이 많은 듯 입술을 들썩이는 불빛 몇 개가 바다로 떨어진다 막무가내 파도는 삼킬 것을 찾아 빗발에 젖은 목젖을 세우지만 오늘은 횟감처럼 가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포항 저물 무렵 청봉은 말없이 뿌리까지 젖는다 빗발은 미시령에서 폭설로 차오르고 희뿌연 늦가을 설악이 지워질 듯 어둠이 바다에서 느리게 걸어온다 이제 산길 뱃길 모든 소식이 끊기고 나면 모두가 한 마리..

좋은 시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