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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부지깽이/조경숙

에세이향기 2024. 5. 3. 03:09

부지깽이

 

 

조경숙

 

 

 

한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던 나무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죽어가는 불씨를 끌어 모아

살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막힌 숨통을 트며 조금씩 검게 타들어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당에 솥을 걸고 돼지를 삶아

동네잔치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바빠졌다

 

곡식을 널어놓은 멍석을 어슬렁거리는

닭들을 내쫓기도 하고

마당에 기역 니은을 끼적거리는 연필이 되었다가

가끔 길손이 묻는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나도

끝이 까맣게 타들어가 점점 키가 줄고

몽당연필처럼 닳아

끝내 아궁이속으로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저 캄캄한 무덤으로 숲이 사라졌다

토사구팽兎死拘烹

기어이 아궁이는 나를 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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