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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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격포

에세이향기 2024. 6. 6. 10:19

 

격포 / 고운기

격포라 찾아왔네 십년 만이든가

來蘇寺 단풍 곱기도 했는데

철없던 계집애들 여관집 밥 먹고

차 한 잔 마신다고 몰려갔던 다방

사람 드문 바닷가 거기 정담다방

나이 든 여자 하나 하품만 하고 있었지

십년 세월 깜박했네 어느새든가

來蘇寺 단풍 아직 철 이른데

어디였는지 정담다방 찾을 길 없고

정답던 얘기만 허공 중에 떴겠구나

콩국수 말아 먹는 여자 하나

입에 든 것 삼키지도 않고

“없어졌제라, 칠 년도 넘괐그만

그 동안 한 번도 안 왔다요…….”

서둘러 자리 뜨는 뒤통수만 가려웠다네.

- 고운기,『섬강 그늘』(고려원, 1995)

격포 / 송유미

미선나무 등걸에 기대어 속을 다 뒤집고 가는

파랑주의보, 허리가 휜 뒷모습 바라본다.

양철구름은 나뭇가지에 걸려 뒤뚱거린다.

방파제 뒤웅박 안에 든 촛불은 시나브로 혼을 태운다.

그 어디에서도 격을 찾을 수 없어

격한 감정으로 격포를 찾았다.

밤바다가 몸부림치는 만큼 내 몸도 뜨거워지고 있다.

바다 위에 누워 바라보는 허공은

이 세상 모든 새들이 날아와 발자국을 찍고도

남아서, 가 사량思量인가.

매운 해풍이 몰아치는 세기만큼

수평선 잡아당기는 집어등 불빛 끊어질 듯 팽팽하다.

파도와 온종일 힘겨루기 하다가

지친 섬 이마 위에 조으는 별빛 몇 개

밤의 입술 속으로 사라진다.

- 송유미,『검은 옥수수밭의 동화』(도서출판 애지, 2014)

격포 / 송재학

격포에 간다는 것은

사소한 나만의 일몰을 가진다는 것!

머리통만한 물거품과 폭설이

서쪽 바다를 죄다 세로로 앞장세웠다가

가로로 눕히곤 한다

나에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다에 헹구어본다

아귀가 맞지 않는 날의

오물이 자주 막히는 몸이 싫다

구석바다에 쪼그려 울어보기도 한다

갈라터진 마음마저 염전으로 맡기고픈

격포에선

무엇이든 다 눈동자가 있어

그리 많은 눈이 내리는가 보다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시선을

받아들였던 격포

아직 날은 어둡지 않은데

벌써 눈뜨는 불빛은 무어냐

거기 옹이처럼 박히자

- 송재학,『기억들』(세계사, 2001)

격포에서 / 정영신

낙조가 남기고 간

환상의 노을 아래

밤을 낚는 불빛 하나

외로이 눈을 뜨고

진정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그대로 소리치는 파도 위에 앉았습니다.

청회색빛 하늘 속엔

내 소망 같은 별빛들이 가득 잠겨 있고

온몸을 뒤틀며 한없이 울어대는

저 바다로 인해

더 이상 내 슬픔은

숨지를 못합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진정 당신을 만나 저 몸부림 같은 열정으로

마지막 내 남은 세월을 태워

사랑할 수 있는 그 날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저 울부짖는 바다 앞에서

숨길 수 없는

내 슬픔입니다.

- 정영신,​『바다·바다·바다』(시와시학사, 2000)

겨울 바다 1 / 신경림

격포*에서

새빨갛게 단 갈탄난로 위에서

커다란 양은주전자의 엽차가 끓고

허벅지까지 덮은 장화에서

뚝뚝 바닷물이 떨어지는 두 어부가

큰 소리로 날씨걱정을 한다

볼이 빨갛게 단 아가씨가 바라보는 창 너머

바다는 시커멓게 성이 났다

다방을 집어삼킬 듯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가는

짐짓 뒷짐을 지고 물러나고

출어 안 나간 고깃배 두 척이

안간힘을 쓰며 방파제에 매달려 있다

* 격포는 서해의 부안에 있는 포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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