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 김나영
폐광이 태백이나 정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리부도에는 삭제되어 있는
없는 게 없는, 서울특별시에도 폐광이 있다.
단돈 850원이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하는
이곳을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사람들과
뜨거운 밥 퍼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몇 년째 대안 없이 불거지고
가끔 아이의 두 눈을 치마폭으로 가린 풍경이 빠져나가고 나면
잠시 술렁거렸던 공기가 다시 흑연 가루처럼 가라앉는
이곳에 갱도(坑道)나 채탄(採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그들의 외투와 손과 신발이 검은 때로 반질반질하다.
햇빛도 그들의 몸에 닿자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리고
희망이 차단된, 가느다란 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두 개의 막막한 구멍들과 나는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영등포역 고가다리 아래, 서울역 주변이 아니더라도
기차표를 손에 쥐여줘도 떠날 곳 없는 생(生)들이
씹다가 뱉어버린 곶감 같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 김나영,『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 2006)
막장, 그때 / 박일만
경사진 삶이 시멘트 길을 만날 때마다 나는 산문山門을 열고 달려 나오는 검은 발원지를 찾아 나섰다
햇빛도 들지 않던 공간 속에서 청춘을 검게 닦으며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슬픈 소리를 가슴 가득 채웠다
지상을 꿈꾸는 동굴 저만치 세상살이에 미숙아인 검은 내가 이마엔 탐색의 더듬이를 달고 붉은 심장으로 서 있었다
이름 모를 들꽃 흐드러진 그곳, 검은 마을에선 기계소리 요란하고 밥 짓는 연기가 날아올랐다
지축을 흔드는 자본주의의 발자국에 짓눌려서도 질경이는 단단한 땅을 밀고 올라왔다
은빛 달무리 뜰 무렵
불씨를 캐던 나의 땀에 은밀한 날개가 돋았다
- 박일만,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서정시학, 2015)
막장에서 / 정호승
미로와 같은 갱 속은 춥고 어두웠다
갱 양편으로 탄가루가 섞인 검은 지하수가 급히 흘러갔다
나는 오직 헬멧에 달린 희미한 불빛만 의지하고
강원도 고한 광원 김장순 씨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더이상 갱도가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자
갱벽 한가운데를 위로 뚫은 좁은 갱도가 또 하나 나타나고
그곳이 바로 지하막장이었다
광원들은 좌우로 버팀목을 세우며 곡괭이를 찍으며
안으로 안으로 파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막장에 널브러진 버팀목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캄캄한 땅 속 저 깊은 곳
어딘지도 모르는 한 지점에
한마리 바퀴벌레처럼 쪼그리고 앉아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김장순 씨는 막장에 앉아 혼자 깜빡 졸 때도 있다고 하면서,
힘차게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막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였다
그는 갱 속 사무실에 보관해둔 도시락을 꺼내
손도 씻지 않고 작업복 그대로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고
다음달이면 농협 빚을 다 갚을 수 있다고 자랑하면서
밥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밥은 꽁보리밥이었다
나는 밥에 탄가루가 떨어지는 것 같아 먹기가 싫은데도
자꾸 더 먹으라고 권하는 바람에 몇 젓가락 떠먹다가
혹시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수줍은 듯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그야 물론 땅 위의 직업을 갖는 거지예
-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막장의 세월 / 정연수
배가 기우는 사이, 배는 막장을 기억했다
막장의 옆구리 어딘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석탄 합리화가 아닌 자본의 합리화
광부들은 문 닫은 갱구 앞에서 잠시 주저앉았을 뿐
원망할 여유는 없었다
살려주세요, 구조대는 오고 있는 거죠
산 자의 마지막 인사는 핏물 든 꽃처럼 붉다
또 만나자며, 안산으로 부천으로 떠나고
터 잡았다고 폐광촌 동료 부르던 세월
안산의 함태탄광 동지는 함우회 만들고
안산의 강원탄광 동지는 강우회 만들고
안산 아이들 탄 배가 기우는 동안
막장은 바다에서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탄광촌으로, 폐광촌에서 공단으로
끝없는 유랑의 세월
바다에다 자식 묻기까지 끝없는 막장
막장은 막장이었다.
- 정연수,『여기가 막장이다』(푸른사상, 2021)
또 다른 막장 / 박영희
사흘 날밤이다
팔 할을 내주고 이 할을 얻었다
현금이 바닥이다
카드를 긁는다
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야트막한 언덕배기에도 숨이 가빠 오고
아랫도리는 고개 떨군 지 벌써 닷새째
그 길로 아내가 야반도주하고,
카지노 입구 전당포에 잡힌 승용차도
반나절 만에 바닥을 드러낸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찾아왔던 길 끊기고
이 할의 희망마저 바닥이 나고
저기, 쥐구멍 하나 보인다
廢鑛이다.
- 박영희,『즐거운 세탁』(도서출판 애지, 2007)
막장에 가고 싶은 날 / 이건청
레일은 녹슬어 있다. 枕木이 녹슨 레일 밑에 깔려 있다. 썩으면서 침목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들레꽃이 민들레꽃의 자리에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이다. 레일은 산맥을 향해 가고 싶지만 산들이 양지에 검은 탄을 조금 토해 놓고 기진해 있다. 갱도 입구 '오늘도 무사히'가,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희미하다.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입구에 커다란 X자가 가로질러져 있다. 레일이 녹슬어 있다. 봄이다.
- 이건청,『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시와시학사, 2000)
여기가 막장이다 / 정연수
삽질을 한다
아무리 퍼내도 끄떡 않는 막장
사람답게 살고 싶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서
굳은살 박이도록 삽질해도 줄지 않는 절망
여기가 막장이다
광부도 사람이다, 투쟁 뒤에
광부에서 광원으로 이름 바꾸고
노동자에서 근로자로 해마다 달력만 새로 갈았다
도시락 반찬이야 매일 바뀌어도 여전히 가난한 식탁
여기가 막장이다
이 땅의 광부는 가고
근로자, 근로자의 날, 모범근로자 표창
더 쓸쓸한, 여기가 막장이다
내 딸년만큼은 광부 마누라 만들지 않겠다
내 아들놈만큼은 광부 만들지 않겠다
하찮은 걸 소원하는 여기가 막장이다
탄광촌 올 때 다짐했다
삼 년 지나면 떠난다
삼 년만 죽어지내자던 게 삼십 년이 지나도 까마득하다
굳어 가는 폐는 알까
천년만년 썩은 석탄처럼 알 수 없는 까만 세월
여기가 막장이다
내년에는 꼭 떠나자 그렇게 떠나고 싶더니만
정부까지 나서서 떠나라고 등 떠미는 석탄 합리화
탄광촌 들어올 때도 누가 그렇게 등 떠밀더니만
나갈 때도 또 그렇게 등 떠밀린다
발걸음조차 내 의지로 딛지 못하는 땅
여기가 막장이다.
- 정연수,『여기가 막장이다』(푸른사상, 2021)
갱구가 전하는 이야기 / 정연수
바람은 밤에도 쉬지 않았다
희망은 막장에 있었고
막장은 희망을 위해 무거운 동발을 받치고 있었다
어느 바퀴라도 빠지면 기우뚱 무너질 세발자전거처럼
희망과 막장이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
제 가난에 제 발목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폐광 공고 나붙은 게시판에다가는 가래침도 뱉었다
너도 크면 아비만큼은 돼야지
어미의 그런 말을 들으며 아들은 뭉클 아버지를 존경하곤 했다
만 원짜리야 개도 물고 다녔어
뒷주머니에 인감 차면 동네 처녀 줄을 섰지
이젠 전설이 된 얘기를 바람이 전할 뿐이다
친구 떠난 빈집을 바라보던 아이가
도시로 전학 보내달라며 생떼를 쓰는데
철없다고 야단칠 일만은 아니다 차라리 세월을 탓하자
고스톱 칠 때는 껍데기로 광도 먹었는데
어쩌다 세상이 화투판만도 못 해졌는지
서울을 향해 주먹질하는 사내의 뒤집힌 손바닥으로
까칠한 세상이 찍혀 나온다.
- 정연수,『여기가 막장이다』(푸른사상,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