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오십견/정용기

오십견​정용기​  이미 생의 중반을 훌쩍 지나버린 거야.그러니까 수평이 무너진 거야. 엊그제까지는오른쪽에만 주로 무게추를 올려놓았던 거오른쪽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거두어왔다는 거너는 알기나 하는 거야?왼쪽을 늘 업신여기고 따돌려서 시르죽어 있었다는 거왼쪽은 그늘받이에서 눈칫밥 먹으며 견뎌왔던 거너는 알아챈 적이라도 있는 거야? 왼손으로는 이제 뒷주머니의 비밀도 꺼낼 수 없어.머리 위로 치켜들어 희망을 부를 수도 없어.차마 중심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견뎌 왔던 결기가,왼쪽 견갑골에 숨어있던 저 질긴 울분이이제 기우뚱 트집을 잡는 거야, 파업에 든 거야. 한쪽을 보태거나 덜어내도 소용없어.오른쪽과 왼쪽은 애초에 연대보증을 섰으니갈아엎기 전에는 중심잡기 힘들어.우리 삶에 세월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는 거야.물그림..

좋은 시 2024.06.28

낭만 유랑단​/이잠

낭만 유랑단 ​ 이잠​​ 우리 몽골 가서 살까요 더 가난한 사람 되어 낮에는 평원끝 눈 시리게 말 달려 야생 순록 새끼를 몰고 돌아오는 저녁은 어떤가요 ​ 들판에 누워 쏟아지는 별빛 맨몸으로 받으며 배부른 달과함께 숭숭한 꿈자리 없이 밀린 고지서 걱정 없이 곯아떨어지는 망망한 밤도 괜찮겠지요 ​ 뿌리 내리지 못한 슬픔 같은 거 아픈 꼬리 같은 거 삭제해버리고 끝 간 데 없이 밀리기만 하는 이 땅을 떠나 한데에서 떠돌이로 살아 보자요 ​ 난 여기서도 제대로 못 사네 술이나 한잔 더 하세

좋은 시 2024.06.28

접사(接寫)/ 이잠

접사(接寫)/ 이잠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

좋은 시 2024.06.28

늦게 오는 사람/이잠

늦게 오는 사람 ​​ 이잠​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좋은 시 2024.06.26

풍경에 속다/김정수

풍경에 속다김정수오죽 못났으면허공벼랑에 매달린 배후일까범종도 편종도 아닌 종지만 한 속에서소리파문 파먹고 사는주춧돌 위 듬직한 기둥이나 들보 서까래도 아닌추녀마루 기와등 타고 노는어처구니 잡상만도 못한항상 바람과 놀고 있는 풍경은 무상이려니눈곱때기 창이나 벼락치기 문이려니오죽 힘들었으면죽음 끝에 매달려 살려 달라살려 달라 스스로 목을 맸을까10년 행불 소리 소문 없이 보내고 보니어딘가 끝에라도 매달려 손등 문지르고 싶은숨과 숨 사이진짜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바람에 풍경 들여 불이였음을같은 것 하나 없는빠끔, 원통인 것을

좋은 시 2024.06.26

사소한 혁명/이언주

사소한 혁명이언주 ​​​  콩에서 나물까지 거리를  혁명이라 한다면 혁명의 끝은  보자기만한 하늘을 밀어올리기 위해  남발된 언어를 찾아 헤매는 것  바가지로 퍼붓는 비를 맞는다  시루 안에서 허리 세워야하는 직립이란  빽빽한 절망을 꿈꾸는 일  내가 꿈꾸는 詩  빛이 왜 독이 되는지  내막도 모르는 채  빛을 찾아 고개 쳐드는 족속이었음을    당신에게 고백하여야 하나?  별 없는 검은 하늘이 들썩인다  태를 끊으려는 욕망  부리 속 푸른 혓바닥을 숨기고  벽을 두드린다  지독하게 환해지는 어둠  신열 앓는 발이 가렵다   멋대로 일어서는 미친 발가락들

좋은 시 2024.06.26

남편 /김비주

남편 /김비주    다친 다리로 몸을 욕조에 걸치고 머리를 감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곧은 슬픔 하나가 지나간다 한평생 같이 살면서 그의 슬픔이 무언지 짐작만 하였지 묻지 못한다 꿈 속에서만 키워오던 나의 희망이 너무나 간절하여 그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의 틈새에 이는 바람에 잠시 너스레를 실어본다   괜찮아, 아프지?   종골 두개가 나가도록 그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가 무언지 시간을 넘어선 후에 기민해진다. 모두 각기 슬픔에 갇혀있는지라 슬픔의 뿌리 앞에 송두리째 내주는 날을 만난다 엉성하게 내리는 초겨울의 남도 비 사이로 덜 끓은 육자배기가 지나간다 늘 함께이지만 언제나 혼자인 사람들 속에   새빨간 동백이 자지러진다

좋은 시 2024.06.26

고물사 / 이봉주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길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

좋은 시 2024.06.26

뽑힌 못/권선옥

뽑힌 못권선옥네게 깊이 박히고 싶었으나망치질을 견디지 못하고 구부러진 나는너의 고운 살결에 상처만 남기고나는 돌아왔다지금, 생각하면네게서 뽑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끝내 빠지지도 않아서구부러진 채로 네게 매달려 있다면네게는 더 큰 아픔이었을 게다끝이 무디어 네게 깊이 박히지 못한 죄로뿌리까지 뽑히어 이렇게잡동사니 어우러진 못그릇에서뻘겋게 녹이 슬어세월에 말없이 몸피가 줄어 간다이젠 네 몸의 상처도다른 못이 가려줬을 줄 믿는다다만 나의 구부러진 사랑을간간이 되씹어 본다아직도 들척지근한 단맛이 난다

좋은 시 2024.06.17

징/진순분

징/진순분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울고 싶을 때징이 되고 싶다 징 소리로 떨고 싶다내 온몸 푸른 전율에뼈마디 녹아나도록타고난 청승의 목청봇물 터진 서러움이나산 같은 절망 물리치는그 속 울음이고 싶다빛나는 눈물로 걸러낸몇 톨 시어 익을 때까지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울고 싶을 때징이 되고 싶다 징 소리로 울고 싶다소리로 환해진 향기시혼에게 바치고 싶다

좋은 시 2024.06.14

고무신/고경숙

고무신/고경숙 한 짝은 멀리 부엌문 앞으로 날아간 채나머지 한 짝이 우는소리 들렸다엎어져 땅에 코를 박고메리처럼 울었다꺾어진 골목 막다른 셋집낙엽이 수북이 쌓인 토방 밑에서가끔 우는 고무신은어느 저녁엔 밀린 기성회비가 되었다가서리 내린 아침엔시든 무청 한 단처럼 무거운 다리를 끌고우체국 앞을 서성이며 전신환을 기다리다가어느 한밤엔 수족 잃은 늙은 바람처럼코를 풀어대며 울었다밑창이 닳아 야들야들한 위장은선뜻 대문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죽은 전나무 이파리 우수수부서져 내린 저물녘필통을 덜그럭거리며 돌아오다아이는 괜히 메리만 을렀다

좋은 시 2024.06.14

슬리퍼를 찾다가/황금모

슬리퍼를 찾다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다른 쪽을 위해열심히 그 행방을 쫓았다아니,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허전한 내 발을 위해눈길 닿는 곳곳을 훑다가가 닿은 곳,깊숙한 침대 밑에어둑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찾다가 포기해 버린 귀고리 한 짝튕겨 나온 퍼즐 몇 조각억울하게 화풀이의 대상이 된찢어진 과속 범칙금 고지서까지관심에서 밀려난 눅눅한 사연들이저들의 언어로 웅성거리고 있다따지고 보면햇빛 안 드는 세상이 어디 그곳뿐이랴나는 그곳에서급하게 서두르다가얼결에 빗나간 발길질 한번 한 것뿐인슬리퍼 한 짝을 찾아내어먼지를 털고 제 짝을 맞춰 주었다다시 편해진 건내 발이다

좋은 시 2024.06.14

물집 [박후기]

물집 [박후기]    선운사 배롱나무 관절을 어루만지다가당신 멍든 복숭아뼈를 생각했습니다몇 해 전, 날 저문 산길부어오른 당신 복숭아뼈를 만지던내 마음도 그만 쓸리고 접질렸던 것인데요그날, 허리 숙여 절을 하며 엎드릴 때당신 얼굴 슬며시 제 등에 업히더군요      * 요즘 학생들은 집에 책상과 의자가 있어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 일이 없을 게다.우리 땐 밥상 같은 접이식 책상에 이른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야 했다.몸의 하중이 복숭아뼈에 실리므로 물집이 잡힐 만도 하다.좀 오래 되면 살이 단단한 껍질이 되어 시꺼먼 게 볼썽사납게 된다.내 경우엔 왼발 복숭아뼈에 하중이 실려 시꺼멓게 껍질이 생겼고가끔 껍질을 벗겨주어야 한다.한 꺼풀 벗겨내도 다시 껍질이 생긴다.평생을 어루만져주어야 되는 짐인 셈인데마음의 ..

좋은 시 2024.06.09

논두렁 [이덕규]

논두렁 [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좋은 시 2024.06.09

혼밥/이덕규[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혼밥[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낯선 사람들끼리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부담없이혼자서 끼니를 때우는목로 밥집이 있다혼자 먹는 밥이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막막한 벽과겸상하러 찾아드는 곳밥을 기다리며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메모 하나를 읽는다“나와 함께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하략)―이덕규(1961∼)혼밥은 한때 예사롭지 않은 단어였는데 지금은 흔한 단어가 됐다. 바쁘니까 빨리 먹어야 하고, 빨리 먹으려면 말없이 혼자 먹어야 한다. 사람이 싫고 말하기도 싫고 그러다 나마저 싫어질 것 같을 때는 휴대전화나 보면서 혼자 먹어야 한다. 이럴 때는 식사가 아니라 끼니가 된다. 이런 사람이 나 포함,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게 혼밥이 낯설지..

좋은 시 2024.06.09

홍어 - 이정록

홍어 - 이정록​​욕쟁이 목포홍어집마흔 넘은 큰아들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새우 눈으로 웃는다​개업한 지 이십팔 년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꽃잎 한 점 넣어준다​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얼음막걸리를 젓는다​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박복한 이년을 합치면,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우리 집 큰놈은 이제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좋은 시 2024.06.09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고등어의 골목 / 이종진 저녁 찬거리는 고등어였다살아온 날 만큼이나 무뎌진 식칼이고등어의 푸른 등줄기를 몇 차례 내려치고토막토막 나면서 오븐렌지 속에 들어가자고등어는 결국 바다에서의 푸른 생을 끝냈다 한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리식솔들을 이끌고 바다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밥을 찾아 끝없이 유영했으리가끔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우연찮은 골목의 끝을 지나배고픔을 달래며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었으리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참으로 길었다골목마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에 밀려얼마 만큼인지 흘러가고 나서야 나의 서투른귀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모처럼 고등어 찜을 해먹자며푸릇푸릇한 등줄기를 토막 내며새 칼을 하나 사든지 아니면 숫돌에서 갈아야 한다며무뎌진 식칼을 아내가 내 앞에 쓰윽 내밀자난..

좋은 시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