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사(接寫)/ 이잠
옛집이 무너져 내릴 때 안방에 살던 거미는 어찌 되었을까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 생각난다
바다도 먼데 희한하게 게를 닮았던 거미
사방 무늬 천장에서 대대로 새끼 치며 살았을 털 난 짐승
다시 못 볼 사람처럼 나는 자꾸 그놈만 찍어 댔지
다시 못 볼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
숱한 기억들이 은거하던 마당의 넓적돌 밑 쥐며느리 굴
닳고 닳은 마룻장에서 쭈뼛거리던 녹슨 못들
벽지 안에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던 한숨들
침묵 속에서 깜빡이던 별빛들
가장 추운 날 저녁의 경쾌한 숟가락질 소리
하늘과 땅과 내가 마주 잡았던 온기
끝내 간직하고 싶었던 것들 정면에 담지 못하고
천장 귀퉁이에 매달린 거미만 찍었지
다시 못 볼 것을 알기에 낱낱이 다 아름다웠지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시집/ 늦게 오는 사람 중)
(시감상)
기억을 더듬다 보면 내 기억의 어딘가에, 나도 모를 저장소에 가만히 숨어있던 단편들이 불쑥 밖으로 나올 때가 있다. 까마득히 먼 날의 나와 동거하던 이름들, 사람들, 풍경들, 그리고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던 情과 관계들. 살다 지친 어느 날, 노을에 기대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커피잔 속에 가득 찰랑거리는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것들. 부러 외면하고 산 것은 아니지만 외면하고 산 것이 되어버린 어떤 날의 일상이 눈 시리게 그리울 때가 있다. 잃어버린 풍경을 접사하며 산다는 것. 가슴속 추억을 우려내는 방법이다. 아주 진한 차의 풍미를 더하듯, 깨끔 발을 들고 바라보던 아름다운 온기들이 새삼 그립다. 시인의 눈이 잔잔한 독백처럼 茶香을 우린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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