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622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기웃 둥한 어깨 / 이재무  ​​한쪽으로 형편없이 기운 어깨가달팽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다저 기울기는 시대의 풍속과 간난의 세월이 만든 것들끓다 솟구쳐 오르는 불온한 피몸의 제방이 되어 막아왔을 어깨시간에 단련될수록 각질은 두꺼워진다어깨는 적응 혹은 순응의 표상그러나 큰 울음의 발동기 돌릴 때는눈코입보다 먼저 시동이 걸리는 어깨봐라, 저게 저 사람의 전력이다질통, 책보, 따블백, 배낭, 가방 등속 메지는 동안파인 홈과 돌출한 뼈추 잃은 저울인 냥 기웃 둥한 생수평을 잃은 높이는 때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가반원으로 둥글게 몸을 만 사내가계단 층층에 숨을 질질 흘리며 오르고 있다

좋은 시 2024.04.29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그림자 갈아입기 / 차주일 ​​ 14년 넘게 입어온 청바지 무릎이 해졌다날실은 닳아 없어지고 수평의 씨줄만 남아 있다내 청춘의 무릎도 저만큼 환부를 드러냈을 것이다사람들은 내 청춘에서 어떤 수평을 보았을까청춘을 질주해 온 내 걸음 오래오래 바라보니나의 수직을 코바늘처럼 당겨대는 무릎이바로 전 한 걸음을 그림자에 얽어 짠다수직이 무릎을 다시 잡아당기고,내 몸을 닮아가는 그림자만 수평으로 누워 있다내가 몸속에 빛을 켜면 드러나는 저 몇 자의 피륙에서내 청춘은 등잔 기름처럼 닳고 있다이토록 환한 만성통증을 외면해온 나여네게로 가는 문門인 네 환부를 바라보아라, 그러면꼿꼿이 서려고만 했던 나 지워진 어느 날어두워서 뚜렷한 네 그림자를 밟고 있을 것이다그날은 전생으로 떠났던 한 사람 돌아와 무릎 끓고네 그림자를 ..

좋은 시 2024.04.26

붉은 염전 / 김평엽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소금 서 말 ..

좋은 시 2024.04.26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시 파는 사람 / 이상국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데다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그것도 더러는 외상이어서아내는 공공근로나 다니는 게 낫다고 하지만사람이란 저마다 품격이 있는 법이 장사에도 때로는 유행이 있어요즘은 절간 이야기나 물푸레나무 혹은하늘의 별을 섞어내기도 하는데어떤 날은 서울에서 주문이 오기도 한다보통은 시골보다 값을 조금 더 쳐주긴 해도말이 그렇지 떼이기 일쑤다그래도 그것으로 나는 자동차의 기름도 사고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는데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사실은 우주에서 원료..

좋은 시 2024.04.26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백 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세상의 저녁은 소리 없이 스며들고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한 걸음 걸을 때마다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그때의 다급한 호흡은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경판에 서려 있는 푸른 맥박 소리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먹물보다 진한 핏빛 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오래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 지고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골짜기마다 ..

좋은 시 2024.04.25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길이 그린 지도/강수니 내 발등엔 지도가 있다 걷기에만 바빠 못 보던 길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툭툭 불거져 발 거죽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굽은 길도 펴가며 걸어 왔었는데 구비를 돌 때 마다 부풀며 휘어져있다 위기 때마다 불끈, 힘주어 일어섰던 불거진 마디들 저 아래 퍼런 시집살이 정맥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자지러지는 아기 업고 숨 멎을 듯 뛰던 길 남편 상여 뒤로 발 굴리며 따라가던 깜깜한 길들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세월의 발목을 잡고 여기까지 그려진 지도는 세상의 지우개로는 지울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다 그러나 길은 이어지는 것, 걸으면 또 길이 된다 여기가 종점, 발등 위는 다시 찾아 오르는 길 그래 가자! 이렇듯 걸어 왔는데 어딘들 못 가리! 다시 심장으로 되오르는 회전문 앞에..

좋은 시 2024.04.15

내등의 짐/정호승

내등의 짐 정호승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보니 내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에게 귀한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있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

좋은 시 2024.04.03

소금/이건청

소금 이건청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 이건청, 「소금」전문

좋은 시 2024.04.03

빈 자리가 가렵다/이재무

빈 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

좋은 시 2024.04.03

장독대가 있던 집/권대웅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

좋은 시 2024.03.31

그리움의 총량/허향숙

명랑 ​ 그녀는 산간 마을에 부는 바람 같다 ​ 그녀 목소리에 손을 대면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그녀 목소리의 여울에 모여드는 명랑이라는 치어들 ​ ​ ​ ​ ​ 외출 ​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

좋은 시 2024.03.31

재봉골목/최연수

재봉골목 ​ 최연수 ​ ​시접 좁은 집들이 답답한 그림자를 벗어놓은 골목 봄볕이 은밀한 속살까지 훔쳐보자 눈치 빠른 꽃다지가 보도블록 틈으로 한 뼘 여유분을 풀어놓는다 ​ 걸음들이 서둘러 시침과 박음질을 오가고 안경 쓴 민들레가 골목입구부터 노란 단추를 채운다 ​ 꼬박 달려온 노루발이 숨을 고르는 지퍼 풀린 시간 바짝 죄던 마감이 커피를 뽑아 내리면 잠시 농담 속을 서성이는 슬리퍼들이 붉은 입술을 찍는다 ​ 고단한 품이 넘쳐 돌려막기에 바쁜 카드들 골목이 느릿느릿 바람 쐬러 나가면 쪽창을 열어젖힌 채 갖가지 공정에 바쁜 꽃밭, 마감에 채 눈꼽을 떼지 못한 꽃도 있다 ​ 뒤집은 오후에 납기일을 접어 넣고 체불을 오버로크해도 자꾸만 뜯어지는 생의 밑단들 한 톨 한 톨 땀방울을 꿰면 낡은 목장갑처럼 올 풀린 ..

좋은 시 2024.03.30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옥수수를 기다리며 / 황상순 ​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어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걱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진다 ​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 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

좋은 시 2024.03.26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 / 박제영​ ​ 카트만두를 여행하는 것과 카트만두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았지만 밑도 끝도 모를 당신이라는 오지를 살아내면서 당신이라는 미로를 살아내면서 아직도 우리는 서로의 중심에 닿지 못했으니 서로의 극점을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서로의 오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미로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해도 좋을 백년의 오지, 백년의 미로를 함께 살아내는 것 우리가 백 년을 해로하는 방식일 겁니다 ​

좋은 시 2024.03.26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

좋은 시 2024.03.26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고경자 기대는 잔잔한 빗금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얼굴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빗금보다 섬세한 무늬로 햇살의 크기만큼 잘게 부서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서성댄 증거입니다 왈칵 쏟아내는 울음이 두려워서 눈물을 모른 척 해봐도 번번이 실패라는 누룩이 증식되어 발효되기까지 습지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의 굴곡이 아닐까 하여 쉽게 돌아볼 수 없습니다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그림 앞에서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이행단계라는 또 다른 건널목이 있어 차단막이 내려진 기찻길 앞에 선 것 같은 초조함 때문일까요 예고 없이 찾아온 빈혈로 쓰러지는 상상을 하면서 때때로 꿈속에서도 이유 없이 쓰러지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 하나로 명명되어진 ..

좋은 시 2024.03.17

식구/이경림

식구 제 몸이 의자인지도 모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의자들과 탁자인지도 모르고 그 가운데 넙적 엎드려 있는 탁자와 장롱인지도 모르고 속에 온갖 것 담고 투박하게 기대 있는 장롱과 침대인지도 모르는 침대와 TV인지도 모르고 중얼거리는 TV와 벽인지도 모르고 허공에 칸을 질러대는 벽들과, 그 벽 속의 물소리와 지붕인지도 모르고 그 위에 수굿이 덮혀 있는 지붕과 그 밑 조그만 화분에 발 오그리고 아슬히 피어나는 제 몸이 꽃인 줄 모르는 꽃들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저 들숨 날숨의 그 속에 캄캄하게 뜨고 지는 햇덩이와 새벽녘 저 혼자 후둑후둑 지는 제 몸이 별인지도 모르는 별들과 그것들 한아가리에 넣고 언젠가 콱 입 닫을 악어 한 마리! 이경림(1947~) 이 시는 “모르는” 것들로 빼곡하다. 시인은 인간의..

좋은 시 2024.03.15

바닥론 / 김나영

바닥론 / 김나영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바닥에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만 지인은 내 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 아니냐고 염려 하지만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 내 몸을 납작하게 깔았을 때 집 안에 평화가 오더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바닥이 부실해서 생겨난 일이다 세상의 저변을 조용히 받치고 가는 바닥의 힘을 온 몸으로 전수받기 위하여 나는 매일 바닥에서 뒹군다

좋은 시 2024.03.14

산방일기 / 이상국

산방일기 / 이상국 ​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 어느..

좋은 시 2024.03.12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1954년 ~ , 광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

좋은 시 2024.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