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일기 / 이상국
새벽 한기에 깨어 마당에 내려서면 녹슨 철사처럼 거친 햇살 아래 늦매미 수십 마리 떨어져 버둥거리고는 했다. 뭘 하다 늦었는지 새벽 찬서리에 생을 다친 그것들을, 사람이나 미물이나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민박집 늙은 주인은 아무렇게나 비질을 했다.
주인은 산일 가고 물소리와 함께 집을 보며 나는 뒤란 독 속의 뱀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서럽도록 붉은 마가목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했다. 갈숭어가 배밀이를 하다가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어디서 철버덩 소리가 나 내다보면 소리는 갈앉고 파문만 보이고는 했다
마당 가득한 메밀이며 도토리 멍석에 다람쥐 청설모가 연신 드나든다. 저희 것을 저희가 가져가는데 마치 도둑질하듯 살금살금, 청설모는 덥석덥석 볼따구니가 터져라 물고 간다
어느덧 저녁이 와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몸을 숨겼던 밤이 산적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 멀쩡한 집과 나무와 길을 어둠속에 처박는 산골, 외롭다고 풀벌레들이 목쉰 소리를 하면 나는 또 산 너머 세상의 의붓자식 같은 내 인생을 생각하며 밤을 새고는 했다
봄을 기다리며/이상국
겨울산에 가면
나무들의 밑동에
동그랗게 자리가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의 숨결로 눈을 녹인 것이다
저들은 겨우내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을 퍼올려
몸을 덮히고 있었던 것이다
좀더 가까이 가보면
모든 나무들이
잎이 있던 자리마다 창을 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어디에선가 "봄이다!" 하는 소리만 났다 하면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겨울에 둘러싸인 달동네
멀리서 바라보면 고층빌딩 같은 불빛도
다 그런 것이다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마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1998.
* 미천골이란 이름은 절에서 쌀(米 )씻은 물이 내(川)로 하얗게 흘러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하찮고 천한 “벌레” 같은 삶이 모여드는 미천(微賤)이라도 좋았겠다 싶다.
저 아래 세상은 속을 지지고 뒤집는 일이 많다. 기꺼해야 한 점 숯으로 버려지기 일쑤인 “삼겹살 같은 세상”이다. 그 세상을 피하여 온 곳은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이 생명감을 한껏 돋우는 미천이다. 물푸레나무, 산새, 벌레들은 저 사는 일로 분주하긴 해도 머리 아픈 궁리도 없고 어떤 협잡도 없다. 시인은 비로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보잘것없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부르는 소리를,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천골을 늘 생각한다 하더라도 삼겹살 세상을 쉽게 버릴 순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고기 한 점 나누는 정이 분명 있을 테니.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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