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경으로 가는 배 - 오랜 방황의 끝
고경자
기대는 잔잔한 빗금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얼굴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빗금보다 섬세한 무늬로 햇살의 크기만큼 잘게 부서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서성댄 증거입니다
왈칵 쏟아내는 울음이 두려워서 눈물을 모른 척 해봐도
번번이 실패라는 누룩이 증식되어 발효되기까지
습지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의 굴곡이 아닐까 하여 쉽게 돌아볼 수 없습니다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그림 앞에서도 환하게 웃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이행단계라는 또 다른 건널목이 있어
차단막이 내려진 기찻길 앞에 선 것 같은
초조함 때문일까요
예고 없이 찾아온 빈혈로 쓰러지는 상상을 하면서
때때로 꿈속에서도 이유 없이 쓰러지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 하나로 명명되어진 시간이
청자빛 하늘로 타오르는 오후는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김부회 시인, 평론가
(시 감상)
삶에 대하여 정체성이 멈출 때가 있다. 엄마, 어머니 이전에 하나의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오다 자연 섭리로 인해 정체성의 변화가 생기면 당혹해진다. 우울증이 생기거나 자칫 갱년기라는 강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완경은 또 하나의 내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본문의 말처럼 낯설지 않은 오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늘 반대의 결과물을 수반하고 있다. 초조나 당혹 앞에 멈추지 말고 내게 한없는 힘을 불어넣자. 그것이 완경이 주는 새로운 나의 발견이며 재창조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가을이 되면 좋겠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고경자 프로필)
시와 사람 등단, 나래시조 등단, 《아동문예》 등단. 시집 『하이에나의 식사법』,『고독한 뒷걸음』 ,『사랑의 또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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