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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에세이향기 2024. 1. 15. 03:05

 

무한계단육면체 /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로세로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촘촘히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월식 때 달이 지구그림자에 가리듯이
담배가게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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